감정이 버거웠다. 한 번 화가 나면 집중이 어렵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K는 감정이 버거웠다. 한 번 화가 나면 집중이 어렵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회사에서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동료의 날카로운 표정에, 부하 직원의 무례한 태도 때문에 마음은 자주 분노가 들어찼다. 특히 몇 날씩 야근해 가며 애쓴 프로젝트에서 상사가 자기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한다고 느껴질 때는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집에 돌아오는 길도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이고 걷는 기분이었다. 양동이의 물이 출렁이며 넘쳐흐를 때마다 K의 마음도 힘껏 휘청이는 듯했다.
아이가 말을 안 듣는 날은 K의 감정 버튼이 마침내 눌리는 날이었다. K는 집에 아무렇게 벗어놓은 양말이며 가방을 보고 아이에게 “엄마가 잘 챙겨놓으라고 했지!”라고 일렀다. 아이는 잔뜩 화가 난 눈빛으로 가방을 홱 낚아채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잔소리하는 말이 부드럽게 나갔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자기가 잘못 해놓고. 더 부아가 나서 방문을 벌컥 열었다. “지금 엄마한테 태도가 그게 뭐야!”
이렇게 아이에게 한껏 소리를 지르고 나면 씁쓸함이 더욱 크게 밀려왔다. ‘내가 지금 잘못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밑도 끝도 없는 괴로운 생각이 덮쳐들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은데, 어디부터 손봐야 할지 막막했다. 회사에서는 부족한 직원, 집에서는 나쁜 엄마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한 기분을 점점 더 자주 느끼던 중 K는 감정일기를 함께 써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상황을 기록할 때도 자꾸 감정과 생각이 끼어들어 더 화가 나기도 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그랬다’, ‘이제는 대놓고 무시한다’ ‘지긋지긋하다’와 같은 말이 섞여 들어가니 더욱 힘들어졌다.
그래도 겨우 일기를 한 편 완결한 날은 부글거리던 마음이 한풀 꺾이곤 했다. 물론 어떤 날은 별다른 소득이 없이 느껴졌지만, 화가 나고 마음이 답답해질 때마다 찾던 맥주만큼이나 마음이 진정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이마저 ‘엄마가 요즘 화를 덜 낸다.’고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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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일기에서 가장 먼저 기록하는 것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상황’이다. 화가 나는 일이 수십 가지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가장 화가 난 일 하나에 집중해서 써 내려가는 것부터 마음을 하나씩 정렬해 보는 효과가 있었다. 상황을 다시 복기하고 언어로 펼쳐놓는 과정에서 ‘뭣 때문에 이렇게 열이 받는지 모르겠다’고 씩씩거렸던 K의 마음속이 조금은 더 차분해졌다.
상황을 기록하는 가장 큰 원칙은, 내 감정과 추측을 모조리 빼고 관찰 가능한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다. ‘A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제 한 말을 두고 비웃었다’, ‘팀장은 평소 나를 못마땅해하더니, 이번에 나를 프로젝트에서 빼버렸다’ 라는 내용의 글을 쓰기만 해도 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화가 솟구쳤다. 하지만 ‘비웃었다’, ‘나를 못마땅해해서 그랬을 것이다’는 자신만의 생각이자 추측일 뿐이다. K는 확인되지 않은 자신의 추측에 가로로 취소선을 쭉 그었다.
생각을 덜어내 보니 정작 남는 것은 A의 웃는 표정, 팀장의 업무 지시 내용과 같은 건조한 사실뿐이었다. A가 내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었을 수 있고, 팀장의 행동 역시 나를 다른 프로젝트에 배정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A의 비하하려는 의도’나 ‘팀장의 개인적인 감정’처럼 주관적으로 상황을 해석하여 색을 입혔기 때문에 더 화가 났던 것이었다. 생각과 사실을 분리하여 기록하니 상황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분한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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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일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그 상황에서의 감정과 욕구를 각각 찾아서 기록하는 것이다. 화가 난 이유에만 골몰할 때에는 자신을 괴롭게 한 상황이나 사람에 집중하느라 잘 보이지 않는다. 슬픔, 괴로움, 분노, 외로움과 같은 감정, 그리고 친밀한 관계, 성취, 안전과 같은 욕구에 주목하면, 그제야 상황이 아닌 내 마음이 눈에 들어온다.
상사가 K를 무시한 사건도 ‘여러 번 검토 후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상사가 다시 확인해 보라고 반려했다’는 상황을 적고, ‘화가 났다’는 감정,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을 차례로 기록했다. 욕구에 이르자,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조금 더 와닿았다. ‘인정받고 싶은 바람’이었다. K가 결국 바라는 것은 자신이 한 노력을 상사에게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 마음을 알아주니 마음속 가득 찼던 증기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감정이 가라앉으니 상사에게 자신이 점검한 부분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K뿐 아니라 우리 모두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감정을 글로 옮기는 일은 가장 쉽고 즉각적으로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감정이 격해질 땐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감정일기를 써보자. 객관적으로 상황을 쓰고, 그때의 내 생각과 감정을 찾아준다. 그리고 내가 과연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봐 주자. 끓어오르는 냄비에 찬물 한 컵을 붓듯, 마음의 온도도 조금씩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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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지안
여전히 마음공부가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성격 좋다는 말에 가려진 것들>을 출간하였고,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하였습니다.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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