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조직문화는 숫자와 효율성의 논리에 갇혀 있다. KPI, 성과 지표, 평가 시스템은 때로 조직 구성원 개개인의 고유한 가치와 잠재력을 억압한다. 그러나 진정한 조직의 경쟁력은 차가운 통계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내면적 성장과 연대에서 비롯된다. 한 권의 책, 한 번의 대화는 때로 이러한 메마른 조직문화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최지은 작가의 <그렇게 나는 다시 삶을 선택했다>는 단순한 자전적 이야기를 넘어, 개인과 조직이 마주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들을 담고 있다.
눈이 내린다. 일기예보대로 꽤 많은 눈송이가 땅 위로 쏟아지듯 내리고 있다. “설 연휴 첫날 무엇을 하고 싶어?”라고 묻는 내 질문에, 아내는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바닷가를 거닐고 싶다고 했다. 어젯밤에 요란하게 울리는 긴급 안전 문자에 “바다는 다음에 보러 가고 집에서 그냥 쉴까? 영화를 보러 갈까? 아니면, 집에서 차 마시며 책볼까?”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아내가 자기 전 읽던 책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야기와 최지은 작가 북토크에서 듣고 나눴던 이야기를 곱씹어보다가 잠들었다.
그래서일까? 하늘에서 내리는 눈 때문인지 더욱 어스름한 겨울 아침, 스르르 켜지는 각성의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들은 ‘현재, 선택, 정체성, 위로와 응원 그리고 유머’였다. 어제 최지은 작가가 자신의 책 <그렇게 나는 다시 삶을 선택했다>를 관통하는 다섯 개의 키워드로 꼽은 단어들이었다. 정말 그랬다. 그는 자신의 책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 이야기들을 꿰뚫는 적확한 단어들을 건져내어 독자들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전했다.
북토크 장소는 17층이었는데, 올라가려고 기다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최지은 작가를 만났다. 책 앞날개에 있던 프로필 사진과 똑같진 않았지만 바로 ‘그’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인사를 건넸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을 때 아내도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했고, 오늘 북토크에 함께 온 20년 차 부부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내는 그가 최지은 작가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1시 40분까지 오라고 했는데 늦었어요.”라는 그의 말에 막연히 진행팀 가운데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병치레로 초췌한 아픈 모습이라고 상상했는데 그는 너무 팔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북토크가 이어진 두 시간 반 동안 그의 말은 경쾌하고 힘찼다. 어느 프레젠테이션에서도 접하지 못했던 파워풀한 리듬은 힘 있게 물 위를 가로지르는 수상스키 선수 같기도 했고, 가볍지만, 선명하게 짚어내는 단어와 문장은 마치 소금쟁이가 가볍고도 빠르게 물 위를 걸으며 만들어내는 파문 같았다. 그래서일까? 나랑 아내, 함께 참여한 독자 모두가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첫 한 시간 동안 전해준 그의 이야기는 빼곡하게, 단정하게 적힌 노트 메모에 기대고 있었는데, 어찌나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지 감탄하며 들었다. 집필 배경과 과정, 뒷이야기, 출간 이후의 에피소드 등 한 편의 파노라마 영화를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십 분간 잠시 쉬는 휴식 시간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된 질의응답 시간은, 함께 참여한 독자들의 온기와 애정, 무엇보다도 다정함이 짙게 묻어났다. 어떻게 북토크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최지은 작가와 이 책을 어떤 계기로 알게 되었는지, 전하고 싶은 소감과 질문은 무엇인지 서로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참여한 독자 여섯 명, 최지은 작가, 이 자리를 기획하고 준비한 현님, 친구로서 이번 북토크를 제안하고 모더레이팅한 헌정님, 이렇게 아홉 명이 단출하게 모인 덕분에 대화는 더 깊어졌고 진지했다. 하지만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머를 잃지 않은 즐거운 자리기도 했다.
작년에 나만의 오비추어리(부고기사)를 써보면서, ‘나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좀 더 선명하게 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사전 장례식을 한다면 나는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라는 떠오르는 질문에, 초대 리스트를 조금씩 적어보기도 했다. 무겁지만 중요하고, 먼일 같지만 당면한 과제일 수도 있는 질문들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최지은 작가의 북토크에서 그 질문들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북토크 자리가 더 내밀하고 친밀하게 다가왔다.
작가와의 대화 말미에 다음 북토크를 언제 할 계획이 있느냐는 현님의 질문에, 아직은 정해진 건 없지만 또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싱가포르에서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에 “싱가포르에 살고 있으니 더 편하게 할 수 있죠.”라고 그는 답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중에 최지은 작가님이 싱가포르에서 북토크하면 갈까?”라는 나의 질문에, “넘 좋겠는데?” 아내가 화답했다. 우리는 함께, 다음 겨울 딸이 중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에 싱가포르에 날아가 최지은 작가님 북토크에 참석하고 작가님 부부와 맛있는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때까지 일 년이 남았는데 그 동안 최지은 작가님이 말한 다섯 개의 키워드 가운데 내게 부족한 ‘유머’를 채워야겠다고 슬며시 마음먹었다. 그 첫 시도로, 편성준 작가님의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를 펼쳐 들었다.
북토크에 참여하며 느낀 깊은 감동과 깨달음은 분명 조직문화에도 적용될 수 있는 중요한 통찰이다. 최지은 작가가 언급한 '현재, 선택, 정체성, 위로와 응원 그리고 유머'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는 단순한 개인의 삶의 철학을 넘어, 건강한 조직문화를 만드는 근간이 될 수 있다. 성과 중심의 조직문화에서 벗어나 구성원 각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며, 때로는 유머로 일상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조직. 이러한 문화야말로 진정한 조직의 경쟁력이 아닐까? 앞으로 우리 조직도 이러한 가치를 조금씩 실천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