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 릴스를 보다가 우연히 영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의 인터뷰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화에 대해서 얘기할 때 저는 줄거리에 제일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좀처럼 '스타일'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아요. '스타일'은 핵심입니다. 반 고흐의 그림을 예로 들어 볼게요. 누가 반 고흐 그림이 어땠냐고 물어봤는데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음... 침실을 그린 그림이야. 침대랑 의자랑 창문이 있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겠죠. 아휴, 그 그림 안 봐도 되겠네. 이런 것들로 그림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나요?"
기예르모 델 토로는 화가가 무엇을 그렸는지를 말하는 건 그림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보다는 색감과 질감이 어떤지, 붓터치가 어떤지 등 어떻게, 어떤 스타일로 그렸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영화에서의 핵심이 스타일이라고 말한 거지만 나는 영화 뿐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종종 삶을 '줄거리'로만 평가한다. 직업, 화려한 사건, 성공 여부, 업적 등이 있어야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은 '줄거리'로만 설명될 수 없으며, 그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 무엇을 감각하고 무엇에 집중하는지,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지가 더 본질에 가깝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부다. 그가 '도쿄 토일렛(Tokyo Toilet)'이라고 써진 유니폼을 입고 청소하는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청소부라고만 여길 것이다.
영화 초반에 히라야마는 놀이터 인근 화장실을 청소하다가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를 발견한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 엄마를 찾으러 다닌다. 그러다 아이 엄마가 나타나 아이를 발견하고는 히라야마가 보는 앞에서 아이 손을 물티슈로 닦는 장면이 있었다. 아마 화장실 청소부의 손이 더럽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고는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데리고 가버린다. 히라야마는 그런 상황을 잘 넘긴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는 루틴을 지키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고, 출근길 차 안에서 캔커피를 마시며 카세트 테이프로 올드팝을 듣는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오늘의 풍경을 감상한다.
일할 때는 반사경을 이용해 안 보이는 구석진 곳까지 깨끗하게 닦고 마주치는 사람들에게는 늘 친절하다. 점심 때는 공원에서 가볍게 샌드위치를 먹고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필름 카메라에 담는다. 퇴근 후에는 한갓진 대중목욕탕에서 피로를 풀고 늘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히라야마를 맞이하는 단골 음식점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 잠들기 전에는 헌책방에서 산 소설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히라야마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사람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는 그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고흐의 그림을 침대와 의자를 그렸다는 사실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했듯이, 우리는 히라야마가 화장실 청소부라는 사실만으로 히라야마의 삶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 내가 사는 빌라의 엘리베이터에 막 탔는데 택배 기사가 내 쪽으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택배 기사를 기다렸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의 속도와 보폭을 유지하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젊은 청년이었다. 상자를 든 팔에는 조그만 문신이 있었다. 얼굴은 잘 못 봤지만 멋 부린 느낌 없이 외모가 좀 스타일리시했다. 그동안 빠르게 걷고 급하게 뛰어오고 힘들어 보이는 택배기사를 많이 봐왔는데 그는 뭔가 찌든 느낌 없이 자신만의 방식과 리듬대로 일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택배기사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는 그로 보였다.
우리는 흔히 어떤 직업을 가졌느냐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느냐가 아닌가 싶다. 허름한 집에 살면서 가까운 사람도 없이 화장실 청소를 하며 산다는 말로는 히라야마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 그가 나무와 햇빛을 즐기는 방식, 올드팝송의 가사를 음미하는 것, 마주치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따듯하게 대하는 태도 등 그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야말로 그의 스타일이고 그것이 그의 본질이다.
***덧붙이는 글: 영화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지나치게 깨끗한 화장실, 작위적인 마지막 클로즈업 장면 등 말이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비판을 잠시 멈추고 이 질문만 던지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줄거리로만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스타일을 통해 진짜 가치를 발견할 것인가? <퍼펙트 데이즈>는 우리에게 말한다.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사진 출처 -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사진(인스타그램 @jeolmeundal), 반 고흐의 <아를의 방> 그림(위키피디아), 그 외 모두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스틸컷.
*글쓴이 - 진솔
삶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영화를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현실과 맞닿는지 글로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