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참, 딸일 수도 있다니. 16주 차에 병원에 가서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 둘 맘의 장대한 포부를 적었는데. 확실히 딸인 것도 아니고, ‘딸일 수도’ 있다니.
대개 12주쯤 끝나거나 늦어도 16주, 혹은 20주쯤 끝난다는 입덧이 20주 차에 접어들 때까지 잠잠해지기는커녕 더 심해지면서 지칠 만큼 지쳐있던 시기였다. 받아둔 입덧 약도 똑 떨어지고, 곧 출산하게 될 병원으로 옮길 예정이라 전에 다니던 곳에 해둔 병원의 진료 예약도 취소해 둔 상태였다. 22주 차에 하기로 한 정밀 초음파까지 산부인과에 갈 일이 없어서 입덧 약을 처방받기 위해 부랴부랴 집 근처 작은 산부인과로 향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유튜브 채널도 운영해서인지 리뷰가 꽤 좋은 곳이었다.
요즘에는 잘 먹히던 과일인 참외나 수박까지 토하기도 해서 아기가 주수에 맞게 잘 크고 있는 건지, 내 몸의 어디가 잘못된 건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에 병원에 간 김에 아기 초음파도 같이 봤다. 마침 마지막 산부인과 진료도 4주 전이었으니 볼 때도 되었다 싶었다.
"아기는 주수에 맞게 잘 크고 있어요. 양수 양도 괜찮고, 태반도 괜찮아요. 아기가 코가 높고 다리가 기네요. 성별은 아시죠?"
"네, 아들이요."
…
"음, 그래요?"
옆에 있던 보조 간호사 선생님과 눈빛을 주고받다가 화면을 유심히 보던 선생님.
“딸 같아요. 다리 사이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딸일 확률이 높아 보여요. 그렇죠?” 하고 간호사를 바라본다.
둘째의 태몽은 흔히 말하는 딸 꿈이었고, 첫째 아들인 뉴뉴와 입덧도 많이 달라서 내심 딸일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16주 차 검진에서는 아들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내 감이 안 맞을 때도 있구나 했었다. 첫째 때에는 성별을 알기 전 꿈에 남자 아기가 나와 한겨울에 두꺼운 겉옷을 단단히 입고, 따뜻한 물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길래 내가 구해주겠다며 집에 데려왔었다. 태몽에서 만난 황금 구렁이의 배실배실 웃는 얼굴도, 태어난 아기의 100일쯤 얼굴과 아주 닮아 있었다. 성별도 역시 아들이었다.
이번에는 황금 귀걸이에 분홍 자개 조개. 모두 보석류였다. 하나는 꿈에서 친정 오빠가 내게 준 액세서리였고, 다른 하나는 친정 엄마가 꿔준 태몽이었다. 보편적으로 딸 태몽으로 통하는 꿈들인데, 병원에서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어쩐지 아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첫째는 12주 1일 차에 들어서면서 정석대로 입덧이 끝나고, 임신 기간 내내 컨디션도 좋았다. 행복한 감정이 충만해서 임신이 이렇게나 좋은 일이구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영 입덧이 심해서 20주 내내 자고, 울고, 무기력하고, 토하고의 반복이었다. 토를 심하게 한 날은 얼굴에 실핏줄이 터져 빨간 점이 잔뜩 생기기도 했다. 첫째가 워낙 건강하게 태어나서 혹시 입덧 양상이 다른 둘째 아들은 첫째만큼 건강하지 않으면 어쩌나, 엄마가 잘 못 먹는 데에다 이렇게 늘 힘도 없고 우울해서 아기가 아프게 되지는 않을지 점점 더 기운이 빠졌다.
그리고 20주 차가 넘어 다시 입덧 약을 받으러 간 날, 딸일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입덧이 다를 수도 있겠다. ‘둘째도 첫째만큼이나 뱃속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을 수 있겠다’ 하는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크기가 작을까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주수보다 열흘은 크게 자라고 있는 아기를 확인해서인지 마음도 많이 놓였다. 그리고 이렇게 성별 반전(임산부들 사이에서는 20주 차가 넘어 알고 있던 성별이 달라질 때 이렇게 부른다)이 일어나는 사람이 바로 나인가 싶으면서 얼떨떨했다.
좋지만, 좋은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아기가 만약 여전히 아들이라면, 나중에 엄마가 딸을 기다렸다는 점에 혹여나 섭섭해하지 않을까 하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했다. 마음과 달리 목소리는 들떴고, 날씨는 유독 화창했다. 오월의 신록이 모두 나를 향한 것 같았다.
”엄마 딸 이래!!!!!!!!!!!!“(정확히는 ‘딸일 것 같다’고 하셨다.)
“뭐?????? 축하해!!!!!! 딸이면 그럴 수 있어!!! 입덧 심할 수 있지!!!!!!!!!”
(아들, 딸 모두 있는 엄마의 말이다.)
부랴부랴 시댁에도 연락하니 아버님은 진정하라고 놀라지 말라고 하시고, 어머님은 “그래서 아들이야 딸이야?”를 반복하셨다. 얼마 전에는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몇 차례 물으셨다.
남편은 무슨 일인지 전화를 받지 않아 한참 뒤에나 통화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무덤덤했다. 그리고 식당에서 만난 나를 보며 괜히 “딸이라서 기분 좋은 거야?”라고 물었다. 사실 나는 아기가 건강하게, 주수보다 크게 자라고 있는 게 더 기뻤다. 그 마음이 가장 컸다.
며칠이 지나고 나니 조금 더 담담해졌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첫째 뉴뉴와 백화점에 놀러 가니 예쁜 딸아이들의 원피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프릴도 달리고, 파스텔 톤 공주님 옷들을 보니 담담했던 마음이 요동쳤다. 나도 나 닮은 딸 키우면서 옥신각신하면서 분홍색 공주 옷도 입히고, 나중엔 카페 가서 다이어리 꾸미기도 할 수 있는 그런 엄마가 될 수 있는 건가 하고 설렜다. 딸이라면, ‘엄마, 저를 좀 더 민감하고 섬세하게 돌봐 주세요. 아직은 오빠가 느꼈던 것보다 세상의 음식이 무섭게 느껴지거든요’ 하고 신호를 보내 엄마의 입덧이 더 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모르겠다. 아직도 성별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생각에도 빠졌다가, 저런 생각에도 빠졌다가 여러 감정이 머릿속에 비빔밥처럼 섞여 있다. 그래도 확실한 건, 비빔밥은 다양한 나물과 참기름과 고추장이 섞여 훌륭하고 건강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도 아들이냐, 딸이냐, 무 나물이냐, 시금치 나물이냐가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지만, 사실 난 지금 행복한 상념에 빠져 있다는 건 확실하다. 주수가 지나고 아기의 태동이 잘 느껴질수록, 아기의 존재감이 확실해질수록 아기를 만나게 되는 날에 대한 기대감이 차오른다. 첫 일 년이야 힘들겠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들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 걸 첫째 출산 후에 비로소 배웠으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