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어른들이 꿈이 뭐냐고 물을 때면 난감했다. 열 살 이전에는 작가나 시인이라고 했었다. 그 때마다 영특하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주변 반응이 묘해졌다. 중학생인 나의 꿈은 그보다 구체적으로 소설가나 방송 작가로 마음이 굳어졌었는데 그 말을 할 때면 엄마는 진지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직업을 갖는다는 건 일정한 수입도 중요한데 작가로 산다는 건 생계 유지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걱정 어린 말을 꽤 오래 들어야 했다. 학교 선생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작가가 꿈이라고 하면 “그럼 2지망도 고려해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작가라는 직업은 어쩐지 어른들의 걱정을 받게 되는 일인 것 같아서, 제 아무리 ‘꿈’이어도 현실적인 다른 직업을 상상해내야 했다. 하지만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것 외에 별다른 취미조차 없던 나는 2지망을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법과 사회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너무 멋있었고, 공부가 재밌었던 나는 법조인으로 꿈을 정했고, 드디어 모든 어른들의 응원과 칭찬을 받으며 스무살이 되었다.
대학 시절에도 진로에 있어서는 오랜 기간 우물쭈물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하는지 몰라서 여기저기 기웃거렸고 끝내 나는 글을 쓰는 걸 잘 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작은 언론사의 기자로 취업을 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직업이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고민 끝에 퇴사를 하고 이곳저곳 지원을 하다 마케팅 직무로 두 번째 취업을 하게 된다. 취업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마케팅을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다는 걸. 일이 재밌으니 진급도 빨랐고 연봉도 쑥쑥 올랐다. 그러다 퇴사를 하고 지금까지도 마케팅 직무로 개인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사는 독일의 소도시는 가게도 몇 군데 없고, 편의 시설도, 대형 쇼핑몰도 없다. 한국에서는 퇴근하고 스트레스 풀러 립스틱이라도 하나씩 샀는데, 여기는 백화점도 멀 뿐더러, 립스틱 색도 한국인 취향과는 거리가 먼 시퍼런 색들이 많아 쇼핑도 거의 하지 않는다. 저렴한 금액으로 필라테스 수업을 들을 수 있던 한국과는 달리 가격대도 꽤 비싸고, 일단 집에서 멀어서 안 가게 된다. 맛집도 카페도 전무한 이 곳에서는 내가 가진 모든 취미가 삭제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나의 취미라고 믿어온 것들이 모두 대형 상권에서 제공하는 가성비 좋은 소비였다는 걸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당연히 한국어 책을 파는 서점도 없고, 한국인 친구도 만나기 어렵다보니 평생 경험하기 힘든 숨막히게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지루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놓여서 ‘좋아하는 일이 없다’는 고민이 생기자, 어쩔 수 없이 안 하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구하기 힘든 한식을 재료만 사서 직접 요리하기 시작했고, 날씨 좋은 날은 자전거를 타고 두 세시간을 달렸다. 20년 만에 수영장을 가서 어린이 수영교실에서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돈을 모아서 쇼핑을 하기보다는 가까운 도시로 여행을 다녔다. 런던 가는 왕복 비행기값이 겨우 40유로라는 데 깜짝 놀라며, 저가 항공만 찾아서 여행도 열심히 다녔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이 쇼핑, 실내 운동, 독서가 취미였던 내가 독일에 오자 자전거, 수영, 요리, 여행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좋아하는 일을 비로소 찾았다기보다는 환경이 바뀌자 어쩔 수 없이 나도 바뀌어야 했다.
사실 독일에 와서야 비로소 열심히 하게 된 자전거, 수영, 요리, 여행은 원래의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었다. 자외선 받으며 땀 흘리기, 사람 많은 곳에서 수영복 입고 수영하기, 사 먹으면 맛있고 편한데 굳이 힘들여 요리하기, 집 근처 카페면 충분한데 돈 들여 고생하며 여행하기. 딱 싫어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어서 하다보니까 몰랐던 즐거움이 있었다. 쨍하고 마른 독일 여름 날씨에 한참을 라인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다보면 햇볕이 내 몸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 든다. 모든 고민이 사라지고 바람만큼 가벼워지는 느낌이 든다. 여러 도시를 여행하다보니 체형에 상관없이 비키니를 입고,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자유로워보였다. 여행을 다녀온 직후엔 그들만큼 자유롭게 수영하고 싶어서 동네 수영장을 더 열심히 나갔다. 여행을 갔다올 때마다 없던 취향이 하나씩 생기면서 아무리 고생을 해도 여행이 좋아졌다. 내가 힘들여 한 요리를 남편이 행복하게 먹는 모습을 보니 전보다는 요리가 좋아졌다. 안 하던 걸 하다보니 새로운 게 보였고, 좋은 감정이 생겼고, 멋있어 보여서 배우고도 싶어졌다.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찾기 위해 백지를 펴고 펜을 든다고 해도 어쩌면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평생을 비슷한 경로로 살아온 사람일수록 더욱 그럴 수 있다. 단순히 취미만이 아니라 직업을 찾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새로운 경험을 해야 좋고 싫은 감정이 들고 취향이 생기고, 바람이 생긴다.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취향이 구체적인 열망이 되고, 시간과 돈을 들여 노력하게 되고, 일상이 조금씩 변한다는 생각을 한다.
최근에는 부쩍 독일어 공부가 재밌어져서 매일 두어시간씩 시간을 들여 공부를 하고 있다. 외국어는 영 소질이 없는 줄 알았는데, 전에는 안 들리던 것이 들리고 안 읽히던 것이 읽히자 순수한 즐거움이 생겼다. 그러다 더 잘하고 싶어서 매일 신문 기사를 읽고 있다. 어떤 날은 한 두 단락만 읽고, 어떤 날은 천 단어 이상 긴 기사도 읽는다. 좋아서 하는 공부는 슬럼프가 없다. 다만 하다보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데, 열심히 하는데 비해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은 날엔 우울해지고 한동안 슬럼프가 찾아온다. 그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잘하려고 하지 말자’를 되새긴다. 잘 하려고만 하지 않으면, 좋아하는 일은 계속 즐겁다. 하다보니 신문 기사만이 아니라 패션 매거진도, 소설도, 에세이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마음이 커지는데 비해 실력은 천천히 늘어서 지치지 않으려고 조금씩 힘을 아껴서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다.
이렇게 독일어 공부에 맛을 들렸다는 말을 하면 종종 유럽에서 학업을 하거나 일하는 지인들이 “독일어 공부할 시간에 영어 공부를 하라”는 말을 하곤 한다. 독일에서도 꽤 많은 대학과 회사에서 영어만으로도 소통을 하기 때문에, 투자한 노력 대비 효용은 영어가 더 클 것이란 것이다. 그들은 꽤 집요하게 나의 독일어 공부에 대해 쓸모를 묻고, 안타까워한다. “독일에만 살 거야? 독일어는 특히 어려워서 지금 열심히 한다해도 일정 수준 이상 실력을 늘리긴 어려워! 성공하고 싶으면(?) 영어 공부를 해” 특히 곧 귀국을 앞두고 있는 내 상황에서는 그들의 말은 사실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독일어보다는 영어를 잘 하는 게 내 인생의 수많은 기회를 확장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흔들림없이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는 내가 좀 이상하기도 했다. 시인도, 소설가도, 방송 작가도 남들 말에 휙 포기해버렸던 내가, 굳이 특별한 목표도 없이 독일어 공부를 지금 이 시점에 왜 하고 있을까. 그것도 엉뚱하게 신문 기사를 읽다니.
경험을 통해 내 몸의 감각에 ‘즐겁다’고 인식된 것은 다른 어떤 설득 앞에서도 강한 힘을 갖는 것 같다. 평생 영어 시험 점수를 만드느라 많은 시간을 들인 내가 영어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는 늘 우물쭈물했었다. 그러다 독일어 한 마디도 못해서 샴푸를 사러 갔다가 한참을 헤매고, 종이에 서명하라는 말도 이해 못해서 벼락같은 호통을 들었던 내가 1-2년 만에 독일인들과 대화하고, 콘텐츠를 보고, 글을 읽고, 소통을 하게 되면서 느낀 그 짜릿함은 꽤 오래 갔다. 게다가 지루함을 못 견뎌 긴 글은 잘 안 읽는 나에게 짤막한 신문 기사로 세상 돌아가는 걸 보는 건 너무나 즐거운 일이다. 이왕 재밌어진 거, 하는 김에 더 잘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제야 내가 독일어를 공부하는 이유도 외국어의 즐거움을 느낀 ‘경험’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영어권 국가에서 살아본 적 없는 협소한 시야 때문인가 싶은 생각도 따라왔다. 아마 영어도 독일어처럼 새로운 세상에서의 경험이 더해진다면 또 폭발적인 즐거움과 짜릿함을 줄거라 생각하는데, 역시 무언가를 좋아하려면 한 번은 인상적인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이 없거나, 직업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땐 이제는 새로운 경험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새로운 경험이 나에게 즐거움, 자유로움, 성취감 같은 것을 선물할 때 비로소 그에 대한 반응으로 좋아하는 감정도 생긴다는 생각을 한다. 억지로 남들이 조언하는 효율적이고 쓸모있는 것일 필요도 없고 지금 내 상황에서 가능한 곳에 손을 뻗어보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마케팅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는데, 취업 준비생인 내가 그걸 알 턱은 없었다. 회사를 다녀보니 어떤 조건의 근무 조건이 나에게 맞는지도 차차 알게 됐다. 애초에 경험하기 전에 아는 것들, 말하자면 장래 희망 적기 같은 것들은 사실 나에 대한 것이라기보단 남의 의견을 조율하는 일이라 어려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험들이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일들이 떠오르기 마련이고, 좋아하는 것들이 없다면 안 하던 것을 해봐야겠다는 생각하며 조금씩 경험치를 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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