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을 하다가도, 밥을 차리다가도 그 생각이 났다. 운전을 하다가도, 밥을 차리다가도 그 생각이 났다. 친구가 연거푸 약속을 미뤄 서운했는데, 그게 계속 떠오른 것이다. 친구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우연히 그런 일이 연달아 일어난 것뿐이지 별일도 아닌데 왜 계속 생각하고 있냐고. 내 안의 어떤 목소리가 말하는 듯했다. 왜 그렇게까지 서운한지 머릿속으로 아무리 마음을 정리해 보려 해도 생각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럴 땐 노트를 펼쳐야 한다. 나는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감정일기’를 쓰곤 한다. 지금 내가 어떤 마음인지 두서없이 적어 내려가다 보면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납득이 되기도 하고, 우울한 이유가 보다 분명히 보이기도 한다. 청록색 커버의 노트는 항상 책상 가장자리에 대기하고 있다. 언제든 쓰고 싶을 때 쓰라고 둔 거기도 하지만, 실은 물건을 늘 한 자리에 두는, 다시 말해 정리를 잘하지 않는 내 습관 때문이기도 하다. 손만 뻗으면 있는 노트를 펼치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괜히 잘 덮어뒀던 감정이 더 격해지거나 별일 아니었던 일을 괜히 키우게 될까 봐 망설여지기도 한다.
꼭 부정적인 감정을 확인하고 정리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잠깐의 긴장이나 불쾌감은 굳이 그 감정을 붙들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산책을 하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처럼 기분 좋은 활동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기도 한다. 이렇게 주의를 환기하는 것도 감정을 조절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계속 같은 감정이 들거나 언짢은 사건 하나가 반복해서 떠오른다면, 그 감정을 탐색해 보라는 사인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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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감정을 들여다보고 기록하기 시작할 때는 마음이 더 불편해질 때가 있다. 글쓰기 관련 연구에서도 힘든 일에 대한 글을 쓴 후 처음에는 부정적인 감정이 더 커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하지만 며칠에 걸쳐 계속 기록하다 보면 어느 시점 이후로는 부정적인 감정이 줄어들고, 오히려 희망, 편안함, 감사와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더 많아진다.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그 사건과 감정적으로 거리가 생기면서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오랜 시간 마음에 남아 있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깊은 갈등은 혼자 다루기보다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을 외면하려 할수록 고통은 더 커진다. 감정을 억제할 때, 심박수가 증가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높아지는 등 생리 반응이 불안정해지고, 통증이나 피로와 같은 신체적 증상이 생기기도 하며, 불안이 높아진다. 하지만 막상 부정적인 사건을 그대로 바라보고 감정을 인정한 후에는 심리적, 신체적 긴장감이 줄어든다. 심박수와 혈압이 안정되고, 코르티솔 수치가 낮아진다. 감정을 부인하거나 판단하기보다 받아들이는 연습이 되어 있는 사람은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정서적으로도 영향을 덜 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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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감정을 받아들이면, 나는 너무 예민한 사람인 것만 같고, 친구는 이 관계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친구와 멀어질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최근 많은 연구로 그 효과가 증명되고 있는 변증법적 행동치료(DBT)에서는 ‘철저한 수용(Radical acceptance)’을 강조한다. 이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현실을 마음에 들어 한다거나 체념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일어났고, 나는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이러한 태도로 내 감정을 기록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지금 내 마음에 찾아왔고, 나는 이를 거부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이미 생긴 사건과 감정을 바라본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닌 듯 ‘과민반응하지 말자’,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감정을 무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는 되는 게 없어’, ‘망했어’, ‘운이 지지리도 없어’ 같이 고통을 과장하지도 않은 채로.
서운함은 내가 원하는 감정이 아니었지만, 지금 내 마음의 진실이다. 그 감정을 그대로 옮기고, “내가 무엇이 필요했는지” 질문해 주었다. 나는 우리의 약속이 예측 가능한 것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에게 존중받기를 바랐다. 그 마음에 이르자 그래서 서운하고 힘들었겠다고, 나 자신을 위로하는 글이 나왔다. 그리고 나를 존중하기 위해서 친구에게 나의 진심을 전해야겠다는 다짐도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 겪는 괴로운 감정은 나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도 힘든 감정일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더 잘했어야 한다고 다그치며 찾아오는 죄책감, 사람들에게 거절 받았다고 느낄 때의 외로움, 앞날을 생각할 때 마음을 짓누르는 불안, 모두 누구에게나 수없이 찾아온 감정이었을 것이다. 내게 있는 감정을 탓하며 외면하지 말고, 있는 힘껏 받아들여 글로 담아내 보면 좋겠다. 지금 어떤 기분인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씩 짚어내는 글을 써보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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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Istock
참고 문헌
Murray, E.J., Segal, D.L. (1994). Emotional processing in vocal and written expression of feelings about traumatic experiences. Journal of Trauma Stress, 7, 391–405.
Jainish Patel, Prittesh Patel (2019) Consequences of Repression of Emotion: Physical Health, Mental Health and General Well Being.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therapy Practice and Research, 1(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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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지안
여전히 마음공부가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성격 좋다는 말에 가려진 것들>을 출간하였고,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하였습니다.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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