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8시간이 걸려도 기꺼이 투표하는 이유 '
아일랜드 일상다반사 - 도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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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일보_꽃잎에 날리는 그리움[이준식의 한시 한 수]〈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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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동안 아일랜드에 살면서, 처음 5년간 나는 매년 경찰서를 찾아야만 했다.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경찰관을 만날 약속을 하고, 약속 당일에는 약속 시간보다 으레 1시간 가까이 좁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작은 창문 너머에서 내 이름을 부르길 기다렸다. 매년 이 시간 동안 나는 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다른 국적의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 ‘이방인’ 임을 깨닫게 된다. 또 철문 너머로 곧 만나게 될 이민국 경찰관과의 인터뷰 끝에 내 여권에 찍히는 거주 허가(residence permit) 도장을 받을 때면 왠지 모를 안도감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 도장이 실은 남의 집에서 더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내심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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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에는 인터뷰 예약을 늦게 하는 바람에 비자 유효 기간을 몇 주 정도 지나서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다. 전화를 걸어 ‘유효 기간이 지나서 비자 갱신 인터뷰를 해도 안전한 지'를 묻고 싶었지만, 수화기 너머 경찰관은 그다지 친절한 답변을 주지 않은 채 약속된 날에 와서 물어보라는 말만 했다. 결국 나는 약속된 인터뷰 날까지 10일 간 ’추방‘ 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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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인터뷰 당일, 딱딱한 벤치에 앉아 대기를 한 뒤 무거운 철문이 열리며 이민국 경찰관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받은 배우자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남편과 인터뷰에 동석을 했어야 했는데, 차가운 느낌의 복도 끝에 위치한 이민국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남편과 또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있어 두려운 마음이 나를 압도하지는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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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은 뒤 나의 여권을 펼쳐 1년 전 찍어 준 스탬프를 찾고 있는 경찰관에게 비자 갱신 유효기간이 지나버렸다는 말을 하며 말하자면 그의 ‘자비’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그는 큰일이 아니라는 말투로 괜찮다며 날짜를 확인하고 나서 일사천리로 거주허가증을 발급해 주고, 여권에 또 다른 1년간의 비자를 허락하는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적어도 1년간은 또 안심해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내년에는 3년 기한의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또 그다음 3년이 지난 뒤에는 아일랜드 시민권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말해주었다.
이민의 역사가 긴 아일랜드에서는 복수 국적을 가진다던가, 아일랜드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그리 까다롭지 않다. 부모뿐만 아니라 조부모가 아일랜드 사람이었다면, 조손자녀들이 아일랜드에 살지 않아도 시민권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경찰관은 한국 국적과 함께 아일랜드 국적을 가지면 아일랜드에서 적응하고 혜택을 받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친절하게 조언을 해 주었지만, 한국 정부에서는 복수 국적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했더니 매우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국적을 아일랜드로 바꿀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연례적으로 받게 되면서 적어도 1년에 한 번쯤은 ‘한국 국적’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먼저 아일랜드 국적을 변경했을 때와 한국 국적을 유지했을 때의 이점을 나열해 본다. 무엇보다 한국 국적도 가지고 있는 아이(한국 정부는 해외에서 태어난 경우 만 18세 이전까지는 복수국적을 허용한다.)에게 내가 어떤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유리한지를 생각한다. 하지만 나열된 장점들을 비집고 그저 내가 한국인인 것이 더 자연스럽고 그냥 ‘한국인인 것이 더 좋다.’라는 감정적인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이유로 국적을 변경하지 않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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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나라를 떠나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가정교육, 학교에서의 도덕과 윤리 교육 등을 통해 어린 한국인들의 가치관에 ‘애국심’이라는 벽돌이 쌓이게 되고 그것은 나라를 떠나오게 되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나의 터전과 나의 가족을 떠나왔다는 그 마음 그 부채감을 껴안고 살아가게 되면서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되면서 공간적인 한계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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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커뮤니티 센터에서 저녁에 운영하는 수업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이 수업은 지역의 한 고등학교 교실을 빌려 운영되었는데, 수업을 마치고 찾아간 화장실에서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일을 겪었다. 케이팝의 인기를 아일랜드에서도 실감하게 된 개인적인 체험이었는데, 화장실 칸 안에 사면의 벽에 여러 개의 글씨체로 한국의 아이돌 그룹의 이름과 그 멤버들의 이름이 가득 적혀 있었다. 그 모습이 놀라고 재미있게 느껴졌는데 나는 왠지 모를 장난기가 올라와서 연필을 꺼내 영어로 적힌 이름 옆에 한국어로 그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놓고 나왔다.
또 언젠가 학교에서 잠시 일을 하는데 학생들이 내가 한국인인 것을 듣고 일부러 찾아와서 ‘진짜 한국 사람이냐?’고 물으면서 환한 웃음으로 대환영이라고 말해 준 적이 있다. 또 초등학교 교사인 남편은 내게 아이들의 이름을 한국어로 바꾸어 달라고 해서, 매년 미술 시간에 한국 전통 그림을 소개하며 그림을 그리게 하고 각자의 이름을 종이에 인쇄해서 아이들이 자기의 이름을 써보도록 연습을 하고 그림에 직접 이름을 적어 놓도록 하기도 한다. 학년이 끝나면 아이들이 남편에게 감사의 인사로 카드를 쓰거나 작은 선물을 하기도 하는데, 어느 해에는 한 아이가 한국어로 꾹꾹 눌러쓴 글씨로 ‘한글 모양이 예뻐요.’ 라며 감동의 카드를 보내주기도 했다.
아일랜드에서 외국인으로서 생활하며 겪는 감정적인 어려움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고, 잘 알지도 않으면서 그저 내가 가진 외모로 나를 이해하고 판단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소위 ‘차별’이라는 단어로 정의되며 나의 일상을 여러모로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생활하며 최근의 겪게 되는 일련의 경험들은 동시에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내가 가진 외모와 국적만으로도 나에 대하여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게 하고 낯선 곳에서 환영받는 분위기를 만들게 한다는 점은 나의 일상을 여러모로 활기차게 만들어 주는 요인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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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회정책을 공부하며 원래부터 한국 사회와 사람이 나의 주요한 관심사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관심은 한국을 떠나 아일랜드에서 살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상황들에 염려를 하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내게 새로 생긴 ‘재외국민’이라는 타이틀이 때로는 내가 가진 무력감을 해소해 주기도 하는데, 그 방법은 바로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아일랜드의 영토가 그리 넓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어느 때고 왕복 8시간이 걸리는 더블린 한국 대사관으로의 여행을 기꺼이 떠난다. 긴 여정 끝에 도착한 대사관 투표소에서 머무는 시간은 몇 분 되지 않지만, 투표를 마치고 나오면서 느끼는 뿌듯함은 ‘재외 국민’으로서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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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일 아침 일찍 가족들과 함께 더블린으로 떠날 예정이다.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주민등록증과 여권을 꺼내어 가방에 잘 넣어두었다. 그리고 대사관에서 투표를 마치고는 아이와 함께 잊지 않고 아이와 대사관 앞에서 사진도 한 장 찍어 둘 생각인데, 아이에게 엄마의 나라이자 자신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 먼 길을 달려와 투표에 참여했다는 것을 기록해 두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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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일랜드 일상 다반사
국제결혼을 한 뒤 아이를 키우며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에 살면서 겪고 있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 글쓴이 - 도윤
사람을 돕기 위해 공부하고 또 일하며 살다가, 이제는 아일랜드에서 아내이자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나를 알고 너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내가 쓰는 글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읽고 쓰고 있습니다.
브런치 : www.brunch.co.kr/@regina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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