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와서 나도 모르게 스며든 일상 속 변화가 있다면, 거절을 대하는 태도였다. 커피 한 잔을 하다가도 달달한 쿠키 한 봉지를 건네면 “고맙지만 안 먹을래” 같은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사소한 거절인데 처음 들었을 땐 그 상황이 묘하게 낯설었다. 그 말은 도의적으로 “아냐 괜찮아”하고 두세번 권하면 “그럼 그럴까?”하는 예의상 거절도 아니었고 친절하지만 단호했다. 모두가 맥주를 시킬 때 “나는 차 마실게”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살짝 놀랐다. 다같이 무언가를 먹는 분위기에서 보통은 원치 않아도 일단 남들처럼 하고, 따로 놀면 눈치가 보이기에 먹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익숙해졌었다.
어렸을 적 대학생 과외 선생님이 집에 오시면 할머니가 고구마, 부침개, 과일 같은 것을 산더미처럼 내오셨다. 20대의 젊은 선생님은 배가 아무리 불러도 남김없이 드셨다. 어른이 주시는 걸 복스럽게 잘 먹는 게 예의라며 꿋꿋이, 꽤나 고역스럽게도 드셨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은 음식 먹는 것 좀 도와달라고 하셨고, 나도 가끔 도왔다. 음식을 남기면 할머니가 현관까지 나와서 “아이고 선생님 드시라고 한 거에요 많이 드세요”하고 붙잡는 바람에 다시 들어와 드실 때도 있었다. 그 모습이 힘들어 보여서 선생님이 가시면 할머니께 음식 그만 좀 내오시라고 해도 “어떻게 손님 오셨는데 빈손으로 보내니. 다 못 먹어도 양껏 내는 게 예의다”라며 간식은 좀처럼 줄이지 않으셨다.
거절의 말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고 할머님 너무 감사해요~ 이렇게 많이 주실 필요는 없는데”하면 할머니는 당연하게도 그 말을 “잘 먹겠습니다”처럼 듣고는 물러서지 않고 음식을 권하셨다. 선생님도 그냥 몇 번의 감사를 더 전하고 방으로 간식 거리를 가득 들고 오셨다. 시골에서 농사 짓던 할머니의 고집스러운 손님 접대와 하필 어른들에게 깍듯한 젊은 선생님의 거절 못하는 성격이 만난 이상한 장면이었다.
예의상 몇 번은 거절을 하고, 그 말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 접대 방식이 익숙했던 한국과 달리 독일에서는 두 번째 권하는 말이 거의 오가지 않았다. “고맙지만 안 먹겠습니다” 하는 순간 권한 사람도 거절을 즉시 받아들인다. 모임 분위기가 아무리 무르익어도 누군가가 불쑥 “나 가야해”라고 하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가는 경우도 꽤 많다. 흔한 작별의 레파토리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내일 아침에 일정이 있어서..”같이 부연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이유를 묻지도 붙잡지도 않고 오늘 즐거웠다며 보내준다. 만남의 자리가 갑자기 뚝 끝나는 그 느낌이 처음에는 어찌나 당황스러웠는지. 하지만 굳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고, 미안해하거나 설명할 필요 없이 오늘 너무 즐거웠다는 말만으로도 작별은 충분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형식적인 인삿말도 설명도 없는 그 단호함이 꼭 예의없음으로 비춰지지도 않았다. 언제나 친절하게, 제안에 감사함을 표하며, 설명없이 직접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모습이 어느 순간부터는 훨씬 편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도 누군가의 사소한 제안에 친절하지만 명확하게 거절하고 싶으면서도 막상 쉽지 않았다. 어려운 초대도 고민 끝에 응하고, 잘 못 먹는 음식도 먹으려고 노력하는 습관이 아직은 남아있었다.
한 번은 유럽의 다른 도시에 사는 한국 친구가 고민을 털어놨다.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이 모이는 생일 파티가 있는데, 파티를 준비하는 친구가 단톡방을 만들어 비싼 생일 선물 하나를 돈 모아 구매하자는 제안을 해왔다는 것이다. 금액은 자유롭게 낼 수 있지만, 평균 50파운드 정도씩 내면 목표 금액에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친구는 제안한 금액이 너무 비싸서 내키지 않았고, 그런 불편한 부탁을 한 제안자에게 화도 난다고 했다. 아직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인데, 그렇게 높은 금액을 마음대로 정해서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인만 덜 내기에는 어쩐지 불편한 마음인지라, 제안한 사람에게 장문의 메시지로 너의 제안은 다른 사람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설명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일 파티 당일, 고민은 무색해졌다. 목표 금액의 절반에도 못 미쳐서 생일 선물은 성공하지 못했고, 그런 제안을 불편해 한 사람도 없었으며, 그냥 다들 자기가 내고 싶은 만큼만 냈다. 다른 선물로 대체됐지만 다들 즐겁게 축하를 했고 파티를 준비해준 친구에게 고생했다는 인사들이 오갔다. 어쩐지 누군가의 제안을 거절하는 게 어려운 내 친구만 괜한 마음 고생을 한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유독 타지 살이를 하는 한국인들끼리 공유하는 고민의 형태가 있다. “이 친구가 이런 제안을 하는데 너무 곤란해. 어떡하지?” 나아가서는 이렇게까지 확장된다. “근데 이런 부탁하는 거 좀 민폐 아닌가?” 곤란할 정도의 부탁이면 사실 그냥 거절하면 되는데, 거절의 부담이 너무 큰 탓인지 여러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엉뚱하고 곤란한 부탁이나 제안을 하는 친구를 때론 물색없다고 미워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거절이 쉬웠다면 그런 원망도 불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 역시도 습관적으로 거절할 때마다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하고 미안한 표정 짓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도 요즘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친절하고 단호하게 말하는 연습을 조금씩 하고 있다. 생각보다 효율적이고, 생각보다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소한 부탁이나 제안도 거절을 염두하면 쉽게 할 수 있게 된다.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제안을 고민하는 건 사실 굉장히 어렵다. 상대의 속은 알 수가 없는지라,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청첩장을 받는 것이 곤란한 사람이 있고, 안 받는 것이 섭섭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정중하게 거절하고, 마음 상하지 않고 거절을 받아들이는 게 관계가 편해지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한 번은 한국학을 전공한 독일인 친구가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독일식 아침식사를 한 상 가득 차린 친구에게 선물로 와인 한 병을 건넸다. “아유~ 이런 거 왜 사왔어 진짜 괜찮은데!” 유창한 한국어로 손사레를 치는 친구를 보며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웃음이 났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1년이나 살다온 친구에게선 익숙한 말투가 들려왔다. 한 번도 아니고 서너번은 반복해서 “이런 거 진짜 사오지마 괜찮아”하고는 결국은 정말 고맙다며, 이 와인은 처음 마셔본다는 호들갑스러운 감사를 전했다. 그 친구는 한국어를 잘하는 것 이상으로 확실히 무언가를 캐치한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