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윤은 내 아이를 괴롭힌 아이였다.
방과 후 아이들을 돌봐주는 동네 키움센터에서 신태윤이 우리 아이를 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학기 초 같은 반 엄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걔 있잖아요, 왜 맨날 혼나는 애. 신태윤. 선생님이 걔한테 '넌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니?'라고 했대요."
그땐 신태윤이라는 아이를 몰랐었다. '설마, 요즘 같은 시대에 선생님이 그렇게 말할까?' 싶으면서도, 그만큼 말을 안 듣는 아인가 싶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아이 입에서도 신태윤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걔 선생님한테 맨날 혼나. 교과서도 안 가져오고, 준비물도 안 챙겨와."
어느 날 키움센터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 태윤이가 우리 아이가 만든 레고 블록을 부쉈고, 그 일로 아이가 울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도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둘이 싸웠다는 얘기를 들었다. 센터에서는 둘을 웬만하면 떨어뜨려 놓는다고 했고, 목요일은 태윤이가 오는 날이니 가능하면 아이를 보내지 않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까지 받았다.
태윤이는 마른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아이였다. 강단 있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반면 내 아이는 체구가 작고, 감정 조절이 서툴러 사람들 앞에서 잘 울었다. 나는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물었다. "오늘은 괜찮았어?" 아이의 대답은 늘 같았다. "신태윤 때문에!"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둘은 키움센터뿐 아니라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다. 하루 종일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거였다.
나는 태윤이 엄마와 얘기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같은 반 단톡방에 올라온 녹색어머니 배정표를 확인해봤더니, 같은 날짜에 내 아이와 태윤이 이름이 나란히 올라와 있었다. 단톡방 속 태윤이 엄마의 프로필 사진으로 태윤이 엄마 얼굴도 미리 봐두었다.
녹색어머니 활동을 하던 날, 교통정리를 마치자마자 교문 쪽으로 뛰었다. 혹시나 태윤이 엄마를 놓칠까봐서였다. 평소 같으면 트레이닝복에 모자를 눌러쓰고 나갔겠지만, 그날은 셔츠에 로퍼를 신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음은 급한데 몸이 잘 따라오지 않았다.
교문에 도착해 두리번거렸지만, 사진에서 봤던 여리여리한 갈색 머리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근처에 있던 여자에게 "혹시 태윤이 어머님이세요?"라고 물었지만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보안관실에 조끼와 깃발을 반납한 뒤,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교문을 나서는 남자를 발견했다. 나는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저기요!"
남자가 돌아봤다. "저, 혹시 태윤이 아버님이신가요?" 그가 맞다고 했다. 가까이 다가간 나는 깜짝 놀랐다. 신태윤과 얼굴이 똑같아서였다.
"저희 아이가 태윤이랑 트러블이 있는데 알고 계시나요?" 키움센터 선생님이 태윤이 아빠에게도 얘기를 했다고 들었기에 상황을 알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지난주에는 저희 아이가 만든 레고를 부쉈고, 어제는 팔목을 비틀었다고 해요." "아, 네..."
태윤이 아빠는 회사에 늦은 건지 마음이 바쁜 건지, 정신이 딴 데 가있는 듯 내 말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이와 얘기해보시고 사실 관계 확인하셔서 잘 지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별말 없이 알겠다고 하고 급히 떠났다.
예의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태윤이 엄마에게 따로 연락할까 고민했지만, 일단 한쪽 부모에게 전했으니 기다려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 뒤로 아이 입에서 태윤이 이야기는 점차 줄어들었다.
시간이 흘러, 4학년을 앞둔 겨울방학, 아이 입에서 다시 태윤이 이름이 나왔다. 그러나 이번엔 뉘앙스가 달랐다.
"키움센터 끝나고 편의점에서 친구들이랑 라면 먹었어." "누구랑?" "태윤이랑... 누구랑 누구." "태윤이? 예전에 니가 싫어했던 신태윤?" "어.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친해졌어."
어이가 없었다. 속으로 말했다. '내가 너 때문에 걔네 아빠 붙잡고 얘기까지 했는데.' 그때 결심했다. 앞으로는 아이 친구 문제에 웬만하면 개입하지 말자고.
올해 아이는 4학년이 되었다. 이제는 내가 데리러 가지 않아도 친구들과 동네를 돌아다니며 논다. 공교롭게도 태윤이와 또 같은 반이 되었고, 둘은 이제 매우 친하다.
얼마 전, 학교 옆 놀이터에서 아이와 태윤이,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놀고 있었다. 그때 태윤이 아빠가 놀이터에 와서 우리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집 가서 치킨 먹을래?"
아이한테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생각했다. '혹시 그 아빠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아이를 초대한 걸까?' 그날 아이는 학원 스케줄 때문에 놀러가지 못했지만, 나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태윤이네 집은 우리 집에서 불과 백 미터 거리였다. 정말 가까운 이웃이었다.
아이들이 서로 어색했던 작년의 어느 날, 편의점 앞에서 태윤이와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할머니가 태윤이네 집을 가리키며 알려주었고, 나는 태윤이네 집이 동네에서도 좋은 집 중 하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순간, 태윤이가 준비물을 안 챙겨온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가정 형편은 괜찮아 보이는데 왜 그럴까 의아했었다.
"엄마, 나 태윤이네 집에 놀러가도 돼?"
태윤이 아빠가 내 아이를 초대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이는 태윤이네 집에 놀러갔다. 그리고 놀고 난 뒤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현관문을 열자, 아이와 태윤이, 그리고 또 다른 아이가 서 있었다. 태윤이의 쌍둥이 형제인 해윤이었다.
나는 태윤이가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윤이와 해윤이는 닮았지만 느낌이 좀 달랐다. 태윤이는 샤프한 인상으로 반대표 달리기 선수를 할 만큼 운동을 잘하는 아이였고, 해윤이는 조용하고 둥근 얼굴을 가진, 곰돌이처럼 부드러운 인상의 아이였다.
아이에게 키움센터에서 저녁을 먹었냐고 물었다. "아니, 태윤이네 집에서 먹었어," "아, 진짜? 태윤이 엄마가 저녁 차려주셨어?" 그러자 태윤이가 말했다.
"저희 엄마 병원에 있는데..."
아이들은 할머니가 고기를 구워주셨다고 덧붙였다.
"저희 엄마는 뇌에 혈관이 터졌어요."
엄마가 병원에 계신지 오래됐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싸해졌다. 그리고 흩어져 있던 기억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여태 태윤이 엄마를 본 적이 없었다. 키움센터에는 항상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러 왔고, 운동회 때도 아빠만 응원하러 왔었다. 할머니는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리코더를 한 달째 안 챙겨온 일, 녹색어머니날 교문 앞에 멍하니 서 있던 아빠의 표정. 갑자기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태윤이 아빠는 아내가 없는 이 시간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현장학습 점심시간에 태윤이가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 아이 도시락의 스팸을 자신의 용가리 치킨과 바꿔 먹으며 했다는 말. "너네 엄마 요리 되게 잘하신다." 그땐 스팸은 누가 구워도 맛이 똑같다고 하며 웃어 넘겼었는데, 그 말이 다르게 들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태윤이와 해윤이가 내게 인사했다. 나는 "다음에 또 놀러오라"고 두어 번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이들이 돌아간 뒤, 나는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태윤이네 엄마가 많이 아프신가 봐. 태윤이한테 엄마나 가족 얘기할 때는... 말을 좀 조심해야 될 거 같아.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지?"
아이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나도 사람이야."
아이가 말을 이었다. "태윤이가 그러는데, 걔네 엄마 원래 좀 아팠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신 거래. 병원 가서 엄마 만나면, 엄마가 태윤이가 방금 한 말도 기억 못 한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태윤이 엄마의 상태는 심각한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자꾸만 그 애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샤프한 얼굴로 장난감 총을 쏘던 태윤이, 방 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던 해윤이. 그 둘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서 더 슬프고 묵직했다.
나는 카카오톡에 들어가 작년 같은 반 단톡방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태윤이 엄마의 프로필 사진첩을 열었다.
수영복을 입고 바닷가에서 모래놀이를 하는 두 아이, 잔디밭에서 호스를 손에 쥐고 해윤이와 껴안고 있는 태윤이, 어린 태윤이를 품에 안은 아빠와, 해윤이에게 몸을 기울인 엄마,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서 간식을 먹는 아이들, 그리고 생일 케이크 촛불을 부는 두 아이.
생일 케이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태윤 & 해윤의 모든 날을 응원해. 사랑해.
사진 속 아이들은 지금보다 훨씬 어렸고, 엄마는 언제나 해맑게 웃고 있었다.
시간은 거기서 멈춘 거였다.
거기서부터, 아이들의 삶에서 엄마가 사라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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