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을 마치고 마지막 CT 결과를 보러 갔다. 마스크를 쓴 의사 선생님의 눈이 웃는 모습이면 상태가 괜찮은 거다. 선생님 눈이 웃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6개월 후에 오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국 가는 비행기를 타도 되냐고 물었다. 비행 중에 방사능에 노출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고 실제로 책에서 읽은 적도 있기에 걱정했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은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다녀와도 좋다고 했다. 나는 이미 비행기표를 끊어두었고 여행 가방도 미리 꾸려 두었다. 실은 검진 다음 날 엘에이로 떠나는 일정이었다. 와우! 나의 해외 한달살이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일의 중압감과 돈에 대한 부담감 없이 그저 한 달을 엘에이 사람처럼 살아 보기로 했다. 난생처음 맛보는 해방감에 이미 다 나은 기분이었다.
다음 날, 28인치 여행용 트렁크 하나와 기내용 백팩을 들고 공항으로 떠났다. 열한 시간의 비행 후 LAX 공항에 도착했고 마중 나온 딸아이를 만나 아이가 살고 있던 집에서 한달살이를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캘리포니아 날씨는 좋다 못해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랬다. 2022년 당시는 코비드가 유행하던 시절이었고 나는 그 여행을 위해 백신을 두 번 맞고 증빙서류까지 준비했다. 비행기는 텅텅 비었었고 이코노미 좌석이었지만 손님이 없어 누워서 엘에이까지 갔었다. 미리 얘기하자면 2023년까지 그렇게 텅 빈 비행기를 타고 엘에이에 왔다 갔다 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나는 현지인처럼 필라테스도 다니고 피트니스 센터도 다녔다.
무엇보다 호사스러운 활동은 태평양 즐기기였다. 눈이 아프도록 푸르고 가슴이 벅차도록 넓었던 태평양 바닷가에 수건 한 장 깔고 망중한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뜨겁게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미국 사람들처럼 간단한 수영복을 입고 쏴! 하고 밀려왔다가 떠내려가는 파도를 바라보던 날, 얼마나 행복한지 혼자서도 자꾸만 웃음이 났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해변으로 달려와서 온몸을 바짝 굽고는 했는데 그 덕분에 비타민 D를 먹지 않아도 충분히 합성되었다. 어린아이같이 물놀이하다가 지치면 망고 파는 아저씨에게 10달러를 주고 망고를 사 먹곤 했다.
갤러리에서 일을 하고 있던 딸아이와 가끔 여행을 가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이었다. 세상 어지간한 곳을 돌아본 나에게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을 정하라면 파리도, 로마도 아닌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이다. 그곳은 넓고, 광활하고, 광대하고, 미치도록 드넓은 사막 한가운데의 국립 공원이다. 울산바위 같은 바위가 수천 개가 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국립공원의 입구밖에 안 되는 곳이니 어쩌면 만 개도 넘는 바위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GPS도 터지지 않아 미리 지도를 준비해야 하고 각별히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겁도 없이 딸과 나는 그곳을 두 번이나 차를 몰고 다녀왔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체력을 관리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홀푸드 같은 유기농 슈퍼에서 재료를 사다가 직접 요리를 했고 외식을 해야 할 때는 유기농 재료로 요리하는 샐러드 가게를 자주 갔다. 현지에서 살사댄스를 배우기도 했다. 스무 살 정도의 댄서에게 살사와 차차차를 배웠는데 개인교습 마지막 날에는 간단한 비디오도 찍어주어 지금도 가끔 댄스 비디오를 보곤 한다. 가능한 한 일찍 자고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 노력했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집중했는데 미술관을 찾아다니거나 댄스를 즐기거나 해변에 가서 아이처럼 놀곤 했다.
샌디에이고로 1박2일 여행을 다녀온 후 딸이 아팠다. 열이 나고 목이 아프다고 했다. 직감적으로 코로나라는 것을 알았다. 약국에 가서 테스트 세트를 사서 검사를 했더니 역시 코로나였다. 딸은 나보고 호텔로 빨리 숙소를 옮기라고 했지만 열이 끓는 아이를 두고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와 나는 타이레놀을 함께 먹었고 나는 얄궂은 미국 부엌에서 미역을 불려 미역국을 만들고 누룽지를 끓여가며 코로나 걸린 딸을 간호했다. 이틀째부터 나도 심상치가 않았고 우리는 나란히 코로나에 걸렸다. 잘 먹은 덕분인지 둘이 사이좋게 삼일 정도 앓고는 일상생활을 할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엘에이 한 달 살이었다.
나의 여행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6개월마다 엘에이로 날아가서 미국 서부를 여행하고 했다. 2024년에는 50여 일 동안 스페인을 시작으로 포르투갈, 이탈리아, 독일 등을 여행했다. 나의 비행 마일리지는 쭉쭉 늘어났고 아직도 꽤 많이 남아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나는 암 환우라는 생각을 비타민 먹을 때 말고는 할 틈이 없었다. 베를린의 티어가든 공원을 혼자 달리기도 했고 호수에서 작은 보트를 타기도 했다. 혼자 런던까지 날아가서 온 도시의 미술관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방사능이 걱정되긴 했지만, 평생 누리고 싶었던 자유를 한껏 맛보았다.
암 환우들은 알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불쑥 불안이 찾아 온다는 사실을. 나도 마찬가지이다. 가슴에 사자 한 마리 키우며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자가 아니라 고양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시간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시간을 정해 불안을 가둬두기로 했다. 하루에 한 시간만 불안이 튀어나오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불안으로 흘려보내는 시간은 가성비가 너무나 떨어진다. 한 시간도 아깝기는 하지만 굳이 불안해야 한다면 더 이상의 시간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놀러 다니느라 꽤 돈도 썼지만, 평생 일하느라 종종걸음으로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눈 딱 감고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암 선고를 받은 분이 있었다. 건너 건너 아는 사이였지만 그 근심의 깊이를 알기에 전화 통화를 했다. 현재 내 건강 상태와 뻔질나게 놀러 다니는 일상을 얘기해 주었다. 항암 중에 할 수 있는 운동도 가르쳐 주었다. 앞으로 6개월 후면 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닐 수 있다고, 내가 증거라고 그랬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나도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살아있는 증거’가 간절했었다. 전화를 받은 분은 무척 위로되었다고 했고 몇 개월 후 그도 항암을 마치고 건강을 회복했다. 사는 것은 기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낫겠다고 생각하고, 나은 사람을 찾아보고, 그 사람처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으면 이루어진다. 치료를 받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반드시 이 시간은 지나갈 것임을 믿자. 곧 자유를 누릴 것이라고, 우리 그렇게 믿자.
글쓴이: 구경희
미술대학입시 전문 컨설턴트이다. 인생 이야기를 즐겨 읽다가 글쓰기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아이를 키우며 자신까지 해방된 운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고 한때 바위타기를 꿈꾸었다. 요가, 글쓰기, 그림 그리기를 인생의 동반자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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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명 소개: 슬기로운 항암 생활:
암에 걸렸다. 대장암 3기였다. 명랑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눈물 흘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완치까지 1년 반이 남았다. 요가도 하고 수영도 하고 해외여행도 하고 출근도 한다. 아직, 절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희망을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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