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뭘 자꾸 먹이려는 엄마, 잘 먹지도 않는 반찬이나 식재료를 바리바리 싸주는 엄마에게 종종 짜증을 내곤 했다. 퇴근 후 김해까지 가서 엄마를 돌보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면 바닥난 에너지로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먹지도 않을 것들을 꾸역꾸역 정리해 넣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피곤했다. 냉장고에 들어찬 음식을 ‘먹어 치워야 한다’라는 생각도, 먹는 즐거움을 의무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아 싫었다. 다 먹지 못한 음식이 상해 내다 버릴 때면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 이 반찬들이 얼마나 그리울까’ 싶어 마음이 무겁고 내가 내다 버리는 것이 엄마의 사랑인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엄마를 위해 삶의 일부를 내려놨는데, 엄마는 ‘지친 밤 양손이나마 가볍게 돌아가고 싶다’라는 내 소박한 요청조차 들어주지 않고 자주 나를 심리적 곤경에 빠뜨리니 때때로 영혼이 갉아 먹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따뜻한 물 한 잔과 호두과자 두 알이, ‘먹어라, 먹어라.’하는 엄마 말이, 옆구리가 불룩한 종이 가방이 어쩐지 싫지 않았다.
‘아, 엄마도 나에게 기여하고 있구나.’
나는 엄마와 있는 동안은 엄마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병원에 가면 뭐라도 하나 놓칠까 싶어 정신 바짝 차리고 진료를 봐야 하고, 산책할 때는 안전에 신경 쓰느라 한껏 예민해진다. 내가 있는 동안만이라도 엄마의 불편을 해결해 드리려고 끊임없이 할 일을 찾아내어 쉴 틈 없이 일한다. 그럴 때는 먹고 마시는 것도 생각이 없다.
아빠가 임플란트 수술을 하던 날도 그랬다. 밤 10시가 되도록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았는데 배고픈 줄을 몰랐다. 엄마는 신경 쓸 일이 생기면 도통 물을 마시지도, 밥을 먹지도 않는 나를 알기에 혹시라도 딸이 들러 준다면 따뜻한 물 한 잔, 호두과자 두 알이라도 먹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얌전히 먹어줄지,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됐다고 손사래 칠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종종대며 다녔을 나를 돌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그저 ‘때때로 귀찮은 사랑’이라 여길 때는 단칼에 물리기도 했는데, 그것이 엄마만의 방식으로 딸인 나를 돌보는 일이며 엄마만의 방식으로 우리 관계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가짐이 조금은 달라지는 듯했다. 그래서 감사히 먹고 마셨다.
< 일방적인 돌봄은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여하고 있다 >
누군가 내게 돌봄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이냐고 측은한 눈빛으로 말할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 반짝이는 것들이 많음을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 돌보는 나를 아름다운 전래동화 속의 효녀처럼 말할 때는 돌봄이 얼마나 진흙밭을 뒹구는 듯한 지리멸렬함 속에 기어이 나아가는 일인지 말해주고 싶었다. 돌봄은 그 모든 것이었다.
돌봄이 일정한 분배를 찾아 유지되고 있는 지금에야 확신하는 말이지만, 돌봄이 일방적으로 나를 소진하는 일이었냐면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내가 엄마를 돌보았다고 말한다. 나는 돌봄을 제공한 사람, 엄마는 일방적으로 돌봄을 받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나도 오랜 시간 돌봄에 휘청이며 많은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몸이 불편한 엄마와 새롭게 관계 맺음으로써 가능했던 예쁜 일상과 행복한 순간도 참 많았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부모님을 바라보며 부모님의 인생을 이해해 보게 됐다. 돌봄 안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나를 끝끝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됐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돌봄의 세계에 대한 ‘시선’이란 것이 생겼고 어떻게든 돌봄의 시간을 딛고 나아가고 싶어 글을 쓰고 책도 내게 됐다. 그 모든 것은 엄마를 통해 가능했다. 그건 또 다른 의미의 ‘기여’가 아닐까.
내가 돌봄자와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사회에 무엇 하나라도 의미 있는 것을 보탠다면 그건 엄마의 고난에서 시작되어 나를 도구 삼아 우리가 함께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따뜻한 물 한 잔, 호두과자 두 알처럼 엄마도 엄마만의 방식과 속도로 나를 돌보고 당신의 삶을 다해 나에게 기여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엄마의 노화와 치매가 진행될수록 엄마의 노년이, 나의 돌봄이 어떻게 나아갈지 쉽게 상상하기는 어렵다. 언젠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마를 돌봄 기관에 맡기고 되돌아오는 슬픈 상상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가 점점 더 기력을 잃고 인지가 저하된대도 엄마 스스로 삶에 대한 의지와 내게 그 무엇이 되고 싶은 의지를 잃지 않는 한, 나는 그 곁에서 가능한 한 오래 그 의지를 실현시킬 방법을 찾고 싶다. 어쩌면 나날이 새로워질 엄마와 새롭게 관계 맺는 시도를 멈추지 않기를 다짐해 본다. 비록 엄마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날이 온다 해도 사람은 그 쓸모가 아니라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천천히 단단하게 미래로 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