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에 집중한다는 것은 낯간지러운 것이다. 요가를 하면서 호흡에 따라 동작을 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가만히 앉아 호흡을 관찰해보는 일은 드물었다. 물론 불안하거나 화가 날 때 심호흡을 해보거나 합창 연습을 위해 복식호흡을 시도해 본 적은 있지만 말이다. 가만히 둬도 잘 쉬고 있는 숨을 일부러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효율적인 데다 어딘가 민망한 면이 있었다.
처음 호흡명상을 해 본 것은 발리 우붓의 한 요가원에서였다. 사방이 트여 바깥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스튜디오에는 이미 수행자들이 나무 바닥에 깐 요가매트 위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까맣게 그을린 탄탄한 몸매의 강사는 몇몇 수행자들에게 익숙한 듯 안부 인사를 건넸다. 이내 자연스럽게 모두가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팔을 양쪽 무릎 위에 걸치고 눈을 감았다. 강사는 들이쉬고(inhale) 내쉬라는(exhale) 단어를 천천히 들려주며 호흡에 집중해 보라고 했다. 날숨으로 모든 나쁜 에너지를 내보내고 들숨으로 모든 좋은 에너지를 들이마시라고 안내했다. 마치 온몸을 돌고 돌아 탁해진 피를 심장과 폐에서 맑게 걸러 온몸으로 다시 퍼트리듯 말이다.
코끝의 숨을 따라 에너지가 오가는 상상을 했다. 나무 바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불어 드는 바람, 진한 초록 나뭇잎의 싱그러운 에너지를 온몸 가득 흡수하고, 마음속 걱정과 후회의 찌꺼기, 노곤함과 같은 나쁜 에너지는 모두 밖으로 내뿜는 장면을 떠올렸다.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알게 된 호흡법은 이 호흡 방법과는 반대로 느껴졌다. 마음챙김 자기연민 훈련(MSC: Mindful Self-Compassion)에서의 호흡법이었다. 이곳에서는 들숨으로 좋은 기운을 모아들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라는 부정적인 기운을 들이마시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나의 고통을 직시하기
연민은 우리가 실수나 실패로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 자신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더 잘 했었어야 했다고 나를 자책하거나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며 타인을 원망하는 대신, 지금 겪고 있는 실망, 후회, 불안과 같은 고통을 따뜻하고 친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 지금 그런 마음이구나, 그럴 수 있지’하는 태도로. 최근 연구자들은 자기연민으로 스트레스 상황에서 정서적 회복력을 높이고 상황을 보다 건강하게 받아들이게 되며,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심리 증상이 개선되는 효과가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기연민은 나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실수하거나 실패했을 때 ‘내 인생은 망했다’, ‘역시 나는 쓸모없어’라고 과장하거나, 반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실망스럽고 속상하구나’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의 힘에 압도되지 않고 과도하게 자기를 비난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들숨에서 나의 고통을 기억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혀 도망가고 싶은 일을 모두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응시하는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엄청난 실수도, 누군가가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열등해 보이는 자기 모습도 껴안는 용기이다. 피해버리거나 방치한다면 우리 마음만 무거워질 뿐이다. 마치 닫아도 자꾸만 열리는 팝업창처럼 시도 때도 없이 머리에 떠오를지도 모른다.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 모순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다룰 수 있게 된다.
고통의 보편성
날숨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의 고통이 가라앉길 바라면서 쉬는 숨이다. 이때의 타인은 가족이 되었다가 친구가 되었다가, 뉴스에서 본 누군가가 되기도 한다. 숨을 거듭 내쉬다 보면 어느새 나의 고통에서 시선이 옮겨가 타인의 고통을 더듬게 된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친구, 부모님과 오래된 갈등으로 지쳐 있는 후배, 공황장애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 그들이 겪고 있을 고통을 마주하고, 고통의 무게가 가벼워지길 바라는 바람을 담아 ‘후’ 하고 내쉬어본다.
타인의 괴로움에 머물 때,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고통의 보편성에 이른다. 모양과 크기가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이 순간에도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격이나 능력의 한계 때문에, 운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실수 때문에 우리는 곤란을 겪고 괴로움에 빠지고 만다.
아이 학교는 해마다 그해에 운동경기에서 가장 뛰어났던 학생을 한 명 뽑아 ‘올해의 선수’ 상을 준다. 체육 선생님은 며칠 전 아이에게 그 상을 받을 거라고 귀띔해 주었다. 아이는 물론이고 우리 가족 모두 설렜다. 시상을 하던 날, 각 운동 종목에서의 시상이 끝나고 올해의 선수상을 시상할 차례였다. 순간 아이가 아닌 아이의 친구 이름이 불렸다. 아이의 표정은 얼어붙었고, 나 역시 박수를 치면서도 환하게 웃을 수 없었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 울음을 터뜨렸다. 상을 받지 못한 것도, 친구를 마음껏 축하해주지 못한 것도 속상했을 터였다. “선생님은 왜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서 이렇게 실망하게 만드냐”고 선생님을 탓하기도 하고, “많이 실망스럽지”라고 마음을 알아주기도, “그래도 너가 우리에겐 올해의 선수야, 열심히 잘 했잖아”라며 아이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말에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실은 생각지도 않았던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리라 기대에 부풀었던 것도, 그러지 못해 한껏 고꾸져버린 마음도, 친구에 대한 질투 어린 마음도,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이었다. 내 마음 역시 오늘 하루 동안 롤러코스터 타듯 휘청였던 터였다. 스스로를 타이르듯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사람 마음이 참 약하다, 그지?’ 아이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대번에 ‘아니야’라고 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수긍하는 낯빛으로 변했다.
아이는 저만 불행하거나 유별나서 이런 고통을 겪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든 기대와 실망의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짐작했을까. 어렵게 면접까지 간 자리에서 엉뚱한 답변으로 기회를 걷어차 버렸을 때, 보고서에 어이없는 실수를 해서 채택이 되지 못했을 때, 모임에서 어설픈 농담으로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은 출렁일 수밖에 없다.
내게 찾아온 불행이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 이 상황이 닥친 누구라도 나와 같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릴 때 우리는 평온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내 고통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더욱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편에 서게 된다.
우리 마음은 약하기 그지없어서 작은 일에도 쉽게 곤두박질치고 만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누구라도, 겉으로 강인해 보이는 그 누군가도 마찬가지일 테다. 나와 당신 모두 그런 약한 마음을 안고 살고 있다는 것을 늘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호흡으로 기억해 본다. 들이마시며 나의 고통을 끌어안고, 내쉬며 나와 다를 바 없는 타인의 고통을 그렇게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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