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월마다 한 번씩 입원 연장 신청서를 쓴다. 이번에는 병원에서 이런 요청을 했다. “환자를 부양할 수 없는 사유를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세요.”
나는 이렇게 썼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당해서 같이 사는 것이 힘듭니다.”
더 납득 가능하게 써야 하나 싶어서, 뒤에 한 줄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달 말에 출산입니다.”
어린 시절 폭력을 당하지 않은 자식들은 부양 거절 사유를 어떻게 작성할까. 나를 때리지 않는 아버지였다면, 나는 그를 부양할 수 있었을까. 상상하다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라 그만두었다.
‘죄책감.’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버지의 노후를 내가 책임지지 않는 것과, 아버지의 불행을 외면하는 것은 같은 말일까.
*
몇 달 전,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는 몇 년 전 두 번째 이혼을 했고, 환갑을 조금 넘긴 나이에 치매 진단을 받았다.
입원 과정에서 보호자의 동의가 원칙이라고 해서 자식들에게 연락이 갔다. 몇 달 먼저 임신한 언니는 만삭이었고, 이복동생은 군대에 있었다. 결국 이제 막 임신 안정기에 접어든 내가 대구로 내려가기로 했다.
아버지는 치매를 앓기 전에도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했다.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칼을 든 적도 있었고, 집 안에 기름을 부은 적도 있었다.
2년 전, 아버지와 같이 살아야겠다고, 돈을 좀 달라던 할머니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있다. 그때 할머니는 말했다.
“너희 아빠가 너희 엄마한테 잘못은 했지. 근데 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노. 아무리 그래도 아빠를 안 챙기면 니 천벌 받는데이.”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지만,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본인 역시 아버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손을 놓아버렸다. 아버지가 폭력을 저질렀다는 이유란다.
할머니가 말한 ‘천벌’이, 혹여나 할머니 스스로를 향할까 봐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동시에 아버지가 무사히 병원에 들어가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나는 천벌을 받는다고 해도 크게 무섭지 않았다. 이미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나도 한 아이의 엄마이고, 곧 둘째 아이를 맞는다. 내게는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 감기약을 먹이고, 저녁에 먹일 양파와 야채를 써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뭘 먹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병원과의 통화에서 아버지가 밥은 잘 먹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매 끼니 싹싹 비우신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별 탈 없이 지냈으면 좋겠다. 밥만 잘 먹는 게 아니라 댄스나 종이접기 프로그램도 듣고, 친구도 사귀고, 그 안에서 웃을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찾아가지도 않는 자식들을 너무 보고싶어 하지 않으시면 좋겠다. 그가 저질렀던 과거와는 별개로, 그의 마음이 편안했으면 좋겠다.
다행히 병원비는 국가 지원을 받아 한 달에 10만 원 남짓이다. 할머니로부터 당장 병원비를 달라는 요구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아버지를 부양하는 게 오롯이 자식들 몫이 될 것 같았다. 그때가 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에, 부양의무에 대한 법과 판례를 찾아보았다.
부모가 자식을 지속적으로 학대하거나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 자식에게 부양료를 청구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며 기각한 판례도 있었다.
하지만 내 경우는 그 판례와 완벽히 같지 않다. 아버지는 나를 학대했지만, 동시에 미성년자인 나를 먹이고 재워 주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를 집 밖으로 내쫓지는 않았고, 학교에 보내 주었으며, 한 달에 얼마씩 용돈을 쥐여주었으니까.
폭력도 매일 행사한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나를 죽고 싶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빈도였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어찌나 참고 참았겠는가.
먹여 주고 입혀 준 대가를 자식은 평생, 어떤 상황에서든 갚아야 하는 걸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한 부모에게도,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똑같은 돌봄을 제공해야 하는 걸까.
반대로, 부모를 용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불행을 외면하는 내 마음은 완전히 정당한가.
답을 내리지 않은 채, 부양을 하지 않는 조금 나쁜 딸로 얼마간 지내려고 한다.
내 아이들을 잘 기를 것이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
나를 때리고도 내가 괜찮기를 바랐던, 예전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
작가명 - 서나연
코너 제목 - 강해지는 몸, 약해지는 마음
코너 소개 - 5년간 요가를 가르쳤고 지금은 주 3회 물살을 가르는 수영인, 그리고 시를 읽으며 자주 우는 엄마의 기록입니다. 몸이 단단해져야 마음이 마음껏 약해질 수 있다고 믿기에,강해지는 몸의 감각과 약해지는 마음의 물성을 매달 전합니다.
작가 소개 - 문예창작을 전공했고 요가 강사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수영에 빠져 사는 엄마이자 작가입니다. 세상에 다치지 않으려 운동하고, 세상에 닿고 싶어 글을 씁니다. 저서로 『전지적 언니 시점』(공저)이 있으며, 2025년부터 글쓰기 모임을 이끌고 있습니다.
* https://allculture.stibee.com 에서 지금까지 발행된 모든 뉴스레터를 보실 수 있습니다. 콘텐츠를 즐겁게 보시고, 주변에 널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세상의 모든 문화'는 각종 협업, 프로모션, 출간 제의 등 어떠한 형태로의 제안에 열려 있습니다. 관련된 문의는 jiwoowriters@gmail.com (공식메일) 또는 작가별 개인 연락망으로 주시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