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앤 카슨은 수상 직후 인터뷰에서 글을 어떻게 쓰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중간에서 부터 시작하세요." 멋진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처음'부터 시작하려 하지만, 사실 거의 모든 좋은 글은 '중간'에서 시작한다.
여행 에세이를 쓰려고 할 때, 여행 떠나기 전부터, 여행 첫 날의 일정부터 쓰기 시작하면 흥미 없는 글이 될 수 있다. 대신, 여행에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 가장 당혹스러웠던 순간, 가장 기억하고 싶었던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면, 그 글은 핵심에서 시작하는 흥미로운 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여행에서 내 마음을 가장 흔들어놓은 건 셋째날 호숫가에서 본 낚시하는 할아버지였다."
단순한 후킹의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이것은 글쓰기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첫 문장을 쓰기 힘들어한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다 보면, 서두가 쓸 데 없이 길어지거나, 앞 부분만 쓰다가 시간이 다 가버리기도 한다. 그럴 땐, 그저 내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쓰고 싶은 '마음'을 찾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가만히 보면, 매일 내가 가장 쓰고 싶은 '무언가'는 존재한다. 요즘의 불안일 수도 있고, 불현듯 생각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고, 기억하고 싶은 어제의 육아일상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거기에서 시작한다. "요즘 들어, 유달리 돈 생각을 많이 하고 있고, 그 때문에 불안한다." "불현듯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고기를 구워주던 생각이 나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이는 첫 오페라 관림인데도, 두어시간을 제법 잘 견뎌냈다." 무엇이든 중언부언하거나 돌려 말하지 말고, 중간에서부터 시작할 것.
따지고 보면,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 않을까.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이것저것 고민하거나 준비하려다 보면 허송세월만 하기 쉽다. 그냥 신던 운도화 신고 무작정 하루 달려 보면, 다음 날도 달려볼 용기가 생긴다. 그러다 보면, 러닝에 좋은 운동화를 나중에 가서 살 수도 있고, 더 좋은 코스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완벽주의나 불안과 걱정을 옆으로 치우고, 무작정 시작할 것. 그것이 곧 '중간에서 시작'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중간에서 시작하라는 말은 "정해진 시작은 없다" 즉 "우리가 시작이라 믿는 시작이 진짜 시작일 필요는 없다"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무언가 늘 그럴싸한 시작을 바란다. 그럴싸하게 준비된 결혼과 육아의 시작, 글쓰기와 운동의 시작, 그밖의 모든 거창한 일들에는 더 적절한 시점이나 타이밍, 즉 시작이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사실 모든 것은 본디 우리가 기대하거나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시작된다. 정해진 시작은 없다. 어디서건 내가 오늘 여기에서 시작하는 바로 거기가 '시작점'이다. 중간에서 시작하라. 완벽주의를 버려라. 더 나은 타이밍을 기다리지 말라. 바로 핵심으로 들어가라. 바로 내 마음에 적중하기 시작하라. 내 마음에 적중하는 그 시작을 그냥 오늘 하라. 오늘을 살라. 앤 카슨의 말은 내게 그렇게 들린다.
* 글쓴이 - 정지우
작가 겸 문화평론가, 변호사. 20대 때 <청춘인문학>을 쓴 것을 시작으로, <분노사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이제는 알아야 할 저작권법>, <그럼에도 육아>, <ai, 글쓰기, 저작권> 등 여러 권의 책을 써왔다. 최근에는 저작권 분야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20여년 간 매일 글을 쓰고 있다.
페이스북 - https://facebook.com/writerjiwoo
인스타그램- https://instagram.com/jungjiwoowriter
* https://allculture.stibee.com 에서 지금까지 발행된 모든 뉴스레터를 보실 수 있습니다. 콘텐츠를 즐겁게 보시고, 주변에 널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세상의 모든 문화'는 각종 협업, 프로모션, 출간 제의 등 어떠한 형태로의 제안에 열려 있습니다. 관련된 문의는 jiwoowriters@gmail.com (공식메일) 또는 작가별 개인 연락망으로 주시면 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