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사실 나 말고 덕후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내 딸이다. 나는 덕후를 낳았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태어나서 무엇인가를 인지하고 판단할 때부터 덕질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특정 만화와 캐릭터를 유독 좋아할 때는 사실 그게 덕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이가 특정 캐릭터에 흠뻑 빠지는 게 이상할 리 없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유독 좋아하는 것은 장르를 바뀔 뿐 계속되었고, 지금은 특정 아이돌의 덕후가 되어서 아이돌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딸과의 대화를 길게 지속하기 힘들다.
나는 그 유전자가 나로부터 온 것이라고 확신했다. 도대체 얘가 왜 이러는지, 왜 이리 말이 안 통하는지 남편이 힘들어하면, 나는 '그러게..' 라며 동의하는 척했지만, 사실 그 원인제공자는 나의 유전자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덕질용품에 돈을 쓰고, 티켓팅과 생일카페 등등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며 도무지 나무랄 수가 없고 오히려 거울치료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근에 아주 오랜만에 나의 친엄마와 둘이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내가 결혼한 이후 명절에나 가끔 방문하는 사이여서 시시콜콜 엄마의 사생활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또한 나 역시 나의 뮤지컬 덕질 이야기를 엄마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한 적이 그동안 없었다. 어쨌든 간에 조금은 어색한 오랜만의 단둘 여행을 하다보니 대화할 시간이 많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 중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와 뮤지컬 이야기를 풀며, 요즘 딸의 덕질이 너무 심해져서 고민이다라는 이야기까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엄마는 깔깔 웃으며, 본인도 몇 년 전부터 트로트 가수 덕질을 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보던 그 어마어마한 전용 대절버스 응원단 속에 엄마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엄마는 이모랑 같이 한동안 트로트 가수를 따라다니느라 전국을 떠돌았다고 했다. 그 대절버스에 타서 아줌마들끼리 굿즈 나눔을 하면 얼마나 즐거운지, 또 팬카페에서 어떻게 답글을 달아가며 덕생을 유지하는지에 대한 할미의 덕질요령을 설명해 줬다. 그리고 몇년전 서울에서 한 공연 티켓이 규모도 가장 컸고 가격도 너무나 비쌌는대, 일생에 단 한 번은 꼭 그 곳에 있어보고 싶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질렀고', 먼 발치에서 작은 무대를 봤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엄마는 덕질 원조 마마였다. 요즘 심해진 우리집 그녀 역시 그 뿌리는 사실 엄마에게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깨달았다. 그리고 어쩌면 엄마의 윗세대로도 계속 뿌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무심히 말하던 '덕질 유전자'라는 게 실제로 이렇게 우리 집안에 존재한 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와의 짧은 여행이 끝날 무렵, 엄마는 손주에게 용돈이라도 전달해 주라고 돈을 쥐어주려고 했는데, 내가 그래봤자 쓸데없는 굿즈나 산다며 그냥 주지 말라고 손사래 쳤다. 그런데 그 순간 그런 말을 바로 내가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웃겼다. 이렇게 내가 내로남불이라니 진짜 어이가 없었다. 멋적어진 나는 조용히 씨익 웃으며 덕질 원조 마마에게 그 돈을 하사 받고 막둥이에게 전달했다.
나의 뮤지커러 덕질 중에서도, 덕력이 강하게 들어갔던 뮤지컬 (일면 '덕뮤') 은 바로 뮤지컬 '아킬레스' 다. 내 기준으로 덕뮤의 조건은 일단 의상과 음악, 대사가 모두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멋있어야 한다. 그 기준으로 이 뮤지컬은 대놓고 내 입꼬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려갈 수 없게 만드는 극이다. 모든 착장이 배우와 찰떡이고 대놓고 멋있는 그 대사 하나만으로 나는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래서 이 뮤지컬의 후기는 종전 나의 글처럼 이성적으로 분석할 수가 없다. 뮤지컬을 보고 내가 적어놓았던 후기를 찾아보니 사실 주접이 거의 대부분이다. 아니 전부 다 주접이다. '멋있다, 대박, 미쳤다.' 이런 말밖에 적혀있지 않다. 공연이 끝나면 바로 다음 공연좌석을 찾아 헤매는 그 마약 같은 극이 뮤지컬 '아킬레스'였다. 심지어 그 당시는 코로나19 시즌이어서, 공연장은 퐁당, 퐁퐁당 형식으로 좌석을 빈자리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티케팅이 극악의 난이도였다.
안 그래도 작은 소극장인데, 마스크를 벗지도 못하고, 함성을 지르지도 못하고, 양옆에 좌석을 비워가며 봐야 하는 극악의 상황에서 나는 '아킬레스'와 사랑에 빠져버렸고 그래서 몹시 괴로웠다. (자리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상황에서 티케팅 시간이 다가올 때의 스트레스는 말로 하기 힘들다). 초연이 끝나고 한없이 그리워하던 어느 날, 문득 뜬금없이 '아킬레스 콘서트'가 왔다. 극 중 서사에 맞춰서 아킬레스가 한국에서 콘서트를 연다는 컨셉으로 하는 싱얼롱 공연이었다. 그런데, 공연장이 너무도 작았고, 본진이 나오는 공연날짜도 하루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티케팅에 실패해서 표를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얼마나 공연이 보고 싶은지 결국 서울로 올라와서 양도표를 노렸다. 하지만 공연장 앞에서 아무리 서성여도 표는 나오지 않았고, 나는 응원봉을 사고 리허설만 멀리서 들었을 뿐 입장하지 못했다.
덕후란 이런 것이다. 이런 각자만의 덕극은 대학로에 시시때때로 들어온다. 각종 서사와 해석을 들인 후기를 멋들어지게 쓰고 싶은 극도 있지만, 내용을 곱씹기 전에 그 자체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극. 나를 쥐락펴락하는 나쁜 남자같은 극. 매번 돌아오지도 않고 언제 올지 기약도 없는 그런 극. 그 때문에 덕후들은 공연이 있을 떄 어떻게든 더 보려 하고, 더 행복해 한다.
한 연구에서는 콘서트를 자주 본 사람이 평균수명이 더 늘어난다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한다. 바로 이거다. 덕후 유전자가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 세상에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 순간이 있는데, 어찌 그걸 마다할 수 있는가.
나의 덕극인 뮤지컬 아킬레스는 2020년 초연 이후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 돌아올까? 돌아오긴 할 건가? 그 당시 콘서트장 입장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내가 이러다 할미가 되더라도 아킬레스가 돌아와서 그 곳에 입장할 날이 있으면 좋겠다. 하긴, 나의 엄마도 배낭 메고 트로트가수 지방 행사 원정을 다닌다고 하고, 우리 집 그녀도 군대 간 그 아이돌을 계속 기다린다 한다. 나 역시 어디 멀리 안 갈 테니 부디 돌아만 와주세오. 아킬레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