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에 다녀왔다. 대학원을 졸업한 지 3년 만이었다. 이제 학계를 떠났지만, 번역서를 출간한 ‘과학의 과학’이라는 분야에는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과학의 과학’이라니, 무슨 ‘혼돈의 카오스’같은 말장난인가 싶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일어나는 여러 학문적인 활동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하고 연구하는 분야이다. 그러니까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과학적으로 들여다보겠다는 의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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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2026년 9월, 연세대학교 백양누리에서 열린 '과학의 과학' 워크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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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정말 우연한 계기로 번역하게 되었다. 원래 번역 제안은 연구실 선배에게 들어왔다. 하지만 당시 선배는 전문연구요원으로 근무하는 중이라 다른 일을 병행할 수 없었고, 결국 제안을 고사했다. 그리고 출판사는 같은 연구실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던 나에게 연락을 했다. 연결고리는 과학 칼럼이었다. 당시 나는 선배와 동일한 매체에 과학 칼럼을 기고하고 있었는데, 아마 출판사는 칼럼을 보고 나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선배가 나를 추천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때 나는 연구는 내 길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무얼 해야 하나 방향을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번역 제안을 받게 되자, 어쩌면 졸업한 후에 번역을 하며 먹고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마케팅이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대책 없던 나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이 비친 기분이었다.
기회는 생각지 못한 시기에, 생각지 못한 경로로 주어졌다. 인생은 항상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번역은 그렇게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학자는 반세기 전부터 이 문제를 연구했다. 마크 그라노베터는 1973년 「약한 연결의 강함」이라는 논문에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어떻게 구하는지 조사했다[1]. 결과는 의외였다. 좋은 자리를 알려준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가끔 마주치는 정도의 지인인 경우가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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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느슨하게 이어진 사이를 사회학에서는 약한 연결(weak tie)이라고 부른다. 칼럼을 통해 이어진 나와 출판사의 관계도 그런 약한 연결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이 연결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선배와 나는 같은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였고, 출판사는 선배의 칼럼 편집을 담당했다. 나와 출판사 사이에는 선배라는 공통 지인이 있었던 셈이다. 친구의 친구와는 알게 될 확률이 높다. 약한 연결 중에는 이렇게 강한 연결에서 뻗어 나온 것이 많다.
가까운 사람보다 가끔 보는 사람이 더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가까운 사람들은 같은 대화방에 들어 있고, 같은 공지를 보고,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니 내가 아는 소식은 그 사람들도 이미 아는 경우가 많다. 반면 가끔 보는 사람은 나와는 다른 곳에 속해 있어서, 그가 들고 오는 소식은 내 주변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약하기만 하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2022년에는 링크드인 이용자 2천만 명의 5년치 데이터를 분석한 연구가 나왔다[2]. 연구진은 두 사람이 공통으로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강한 연결로 보았다. 그 결과 일자리 이동에 가장 도움이 된 것은 가장 약한 연결이 아니라 ‘적당히 약한’ 연결이었다. 아예 접점이 없는 사람은 소식을 전할 계기가 마땅치 않고, 너무 가까운 사람은 이미 아는 소식만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출판사 사이에는 선배라는 공통 지인이 있었다. 친한 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닌, 딱 그 ‘적당히 약한’ 연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과학자들의 세계에서는 어떨까? 폴란드의 연구진은 컴퓨터과학 분야의 논문 약 500만 편의 공저 기록을 분석했다[3]. 함께 쓴 논문의 비중이 작을수록 약한 연결로 보았다. 그랬더니 한두 사람과 반복해서 논문을 쓰는 연구자보다 여러 사람과 폭넓게 협업하는 연구자의 논문이 더 많이, 꾸준히 인용되는 경향을 보였다. 약한 연결로 묶인 팀이 쓴 논문도 더 많이 인용되었다. 늘 같이 일하던 사람들과만 연구하면 서로 아는 이야기만 오가기 쉽다. 낯선 곳에서 온 사람과 만나야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는 모양이다. 과학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데이터로 들여다보는 ‘과학의 과학’에서는 바로 이런 주제로 연구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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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는 그야말로 약한 연결이 빛을 발하는 곳이다. 연구실에서 매일 들여다보던 주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떤 연구를 하는지도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뷔페처럼 진수성찬이 차려진 셈이다. 발표를 듣다가 궁금한 점이 생기면 그 연구를 직접 수행한 사람에게 바로 물어볼 수도 있다. 처음 보는 사이지만 같은 분야라는 접점 하나로 말을 걸 수 있고, 질의응답을 주고받다 보면 서로의 연구가 발전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협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는 더 이상 연구를 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즐겁게 학회를 누빌 수 있었다. 발표를 해야 하면 그건 그것대로 부담이고, 다른 사람의 연구도 눈에 잘 안 들어온다. 게다가 이제는 학계 사람도 아니라서,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부담도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활발하게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새로운 자극을 얻을 수 있었다. 학계에 한때 몸을 담갔다가 이제는 떠난, 말하자면 가장자리에 선 사람이라서 여러 사람 사이를 오가기가 오히려 수월했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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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과학의 과학' 분야의 논문을 정리해 팟캐스트를 만든 연구의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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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즐거움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점도 있었다. 한 발표에서는 ‘과학의 과학’ 논문들을 정리해 AI도구로 팟캐스트를 만든 연구를 소개했다. 논문을 읽는 대신 들을 수 있다니, 여러모로 반가운 일이었다. 만원 지하철에서 책을 펴기도 여의치 않은 터라, 출퇴근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래서 나도 궁금한 분야의 자료를 정리해 팟캐스트로 만들어 보았고, 덕분에 출퇴근 시간을 무료하게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연구는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대학원을 뛰쳐나왔고, 연구자로서 학계에 기여했다는 효능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학회에서는 번역서를 정말 잘 읽었고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고, 덕분에 학계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학계와의 인연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번역서라는 가느다란 실, 그 ‘약한 연결’이 인연을 계속 이어주고 있었다.
참고논문
[1] 약한 연결의 강함: Granovetter, M. S. (1973). The Strength of Weak Ties.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78(6), 1360–1380.
[2] 링크드인 연구: Rajkumar, K. et al. (2022). A causal test of the strength of weak ties. Science, 377(6612).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ence.abl4476
[3] 과학자의 약한 연결: Fronczak, A., Mrowinski, M. J., & Fronczak, P. (2022). Scientific succes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strength of weak ties. Scientific Reports, 12, 5074.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98-022-091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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