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덧없는 아름다움을 당신의 품에 안겨주고 싶어서
사유와 자유의 시간
from. 강동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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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꽃다발을 사러 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평소 가장 돈 아까운 선물이 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맛있게 먹어 배를 채울 수도 없고, 그날의 추억을 기억하기 위해 서가 한구석에 오랜 시간 간직해 둘 수도 없다. 며칠 지나지 않아 바스락거리며 시들어버릴 것이 분명한,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덧없는 사치. 실용과 효율의 잣대로만 따지자면 꽃을 사는 일만큼 어리석은 소비도 없을 것이다.
그런 내가 다대포로 향하는 길목에서 꽃집 문을 열었다. 크레타의 책방지기라는 타이틀을 잠시 내려놓고, 그저 한 사람의 편안한 관객이자 열렬한 독자가 되어 김민정, 박준 두 시인의 북토크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남의 무대에서 몸과 마음 편하게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벼웠지만, 내 손에 들린 꽃다발에는 더 각별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몇일 전 ‘앤 카슨’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있었다. 모두가 알지 못했던 시절부터 그 낯설고 매혹적인 세계를 묵묵히 알아보고, 자신이 대표로 있는 출판사 '난다'를 통해 무려 4편이나 번역해 펴낸 김민정 시인의 맑은 뚝심을 축하해 주고 싶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꺼이 종이밥을 지어온 그 지난한 시간 앞에, 꽃 한 다발의 화사함이라도 건네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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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섬에서 노벨문학상까지, 텍스트가 닿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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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포 바닷바람을 마주하고 선 두 시인의 대담은, 시작하자마자 특유의 온기와 유쾌함으로 장내를 물들였다. 이날 이야기의 첫 출발점은 부산 영도를 품은 책 《영영 영도》였다. 사라질지도 모를 섬을 기억하기 위해 44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1박 2일간 머물며 저마다의 서툰 문장으로 길어 올린 기록들이다. 전문 작가가 아닌 이들의 울퉁불퉁한 글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것은, "큰 이야기 대신 내 삶에 가장 가까운 사소한 조약돌을 주워 담으라"던 김민정 시인의 고집 덕분이었다.
곁에서 이야기를 이끌던 박준 시인의 이야기도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100년 전 한국 현대시를 다시 읽어내며 쓴 산문집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를 엮기 위해, 그는 무려 20년 동안이나 싫어했던 이상(李箱) 시인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배울 점이 없다며 오래도록 밀어내던 대상을 억지로라도 붙잡고 들여다보았을 때, 비로소 "진짜를 보지 못했으면서도 가짜가 가짜임을 알아챈 천재의 눈"을 발견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끝끝내 들여다보는 지극한 시선은 시를 읽는 태도이자, 사람을 이해하는 태도 그 자체였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김민정 시인에게 최근 있었던 큰 경사, 앤 카슨의 노벨문학상 이야기로 가닿았다. 김민정 시인은 수상 발표 후 처음으로 앤 카슨의 책을 만들던 날들의 비하인드를 털어놓았다. 2014년, 스치듯 들은 이름에 이끌려 모든 원서를 직구했던 그는 영어가 유창하진 않아도 번뜩이는 스타일에 마음을 빼앗겼고, 본능적으로 ‘이 사람의 옷을 입혀줄 번역가’를 찾았다. 영국 낭독회를 가던 비행기 안, 동행한 황유원 시인에게 원서를 쥐여주며 결을 알아채게 한 뒤, 현지 책방에서 번역하고 싶은 책을 다 골라오라며 판을 깔아주던 편집자의 안목과 배포. 무명의 첫 책이든 세계적인 대가의 원고든, 활자 너머의 고유한 결을 지켜주던 그 다정함이 결국 10년 뒤 노벨문학상이라는 응답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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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지켜보며 선배와 후배라는 관계가 지닐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형태에 대해 생각했다. 10년 전, KTX에서 이동식 매점 카트가 마지막으로 사라지던 그 밤에 맥주를 기울이며 산문집을 계약했던 두 사람. 시인이 산문을 쓰는 것을 주저하던 후배의 등을 떠밀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게 만든 선배와, 그 믿음에 부응하듯 매일 성실하게 문장을 벼려온 후배가 세월을 통과한 뒤 나란히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박준 시인이 첫 시집을 낼 때 해설을 써주었던 고(故) 허수경 시인과의 일화는 선배와 후배라는 관계를 다시금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 투병하던 허수경 시인의 부엌에 놓여 있던, 박준 시인이 6만 5천 원을 주고 사서 배송비만 17만 원을 들여 보냈다는 돌절구에 담긴 마음에는, 허수경 시인이 세상을 떠난 뒤 열어본 노트북 속에서 발견된 수많은 '박준' 폴더들의 아련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 애틋함의 이면에는 선배 세대가 지녀야 할 지극한 솔직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선배 시인이 박준 시인에게 털어놓았던 고백처럼 말이다. 공동으로 시를 엮는 일 앞에서 "솔직히 미안하지만 내가 널 못 믿겠다"며 후배의 몫까지 직접 보겠다고 나섰던 선배. 그 서운할 법한 말 뒤에는 뼈아픈 과거가 있었다. 자기가 젊은 후배였던 시절, 앞에서는 믿는 척 치켜세우면서 뒤로는 결코 믿어주지 않았던 윗세대의 위선을 겪었기에, 차라리 얼굴을 마주하고 "난 널 못 믿겠으니 같이 다 보자"고 말하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앞말과 뒷말을 일치시키며 솔직하게 다가오는 그 서툰 투박함이야말로, 상대를 동등한 문학의 동료로 인정하는 가장 정직한 사랑의 방식이었다.
서로를 온전히 신뢰하기 위해 부단히 긴장하고, 그 긴장을 통해 서로의 등을 다독이며 버텨온 세월의 두께는 그 어떤 화려한 문장보다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서로를 맹목적으로 추켜세우지 않는다. 다만 서로가 쓴 글이 무뎌지지 않도록, 여전히 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마음으로 서로의 문장을 치열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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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다대포의 붉은 노을이 차창 밖으로 길게 번져갔다. 문득 내 손을 떠난 그 꽃다발의 운명을 생각했다.
꽃은 결국 시든다. 하지만 시들어 사라지기 때문에 그 피어있는 짧은 순간이 눈부시도록 찬란하다. 시(詩)라는 장르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시대, 챗GPT가 단 몇 초 만에 오점 하나 없는 매끈한 답을 쏟아내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굳이 단어 하나를 고르기 위해 며칠 밤을 지새우고, 돈도 되지 않는 시집을 만들기 위해 사비를 털어 헌책방을 뒤지는 행위는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그 비효율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증거다. 북토크를 마무리하며 박준 시인이 언급한 롤랑 바르트의 문장처럼 말이다. “형식이 찬란하면 구식이 되고, 형식이 무질서하면 반사회적으로 보이고, 형식이 시간이나 존재에 비해 특별하면 고독해 보인다.”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나 존재에 비해 점점 더 특별해지는 것. 그리하여 기꺼이 ‘좋은 고독’에 닿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시를 읽고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앤 카슨의 문장을 가슴에 품고 마침내 빛을 보게 만든 김민정 시인처럼, 20년을 밀어내던 시인을 끝내 사랑해 낸 박준 시인처럼. 무언가를 오랜 시간 좋아하고 믿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힘이 된다.
돈이 아깝다며 늘 외면해 왔던 꽃다발을 건네며, 나는 어쩌면 시와 문학이라는 거대한 낭비에 삶을 온전히 내어주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 깊은 경의를 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일이면 시들지언정 오늘 밤 가장 붉게 타오르는 꽃처럼,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도 결코 지지 않을 문장 하나쯤은 단단하게 뿌리내리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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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와 자유의 시간
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과 사람이 만나 펼쳐지는 소소하지만 진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 글쓴이 - 강동훈
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인이 꿈이자 목표입니다.
* 인스타그램 : www.instagram.com/bookspace.c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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