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가 내 눈앞에 있다. 초록 풀밭에 갈색 깃털 뭉치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날개가 부러져서 야생에 보내지 않고 노루, 고라니, 산양과 함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날지 못한다고 해도 독수리의 두 눈이 나를 향하고 있다고 느껴지자 어딘지 모르게 꼼짝할 수가 없었다. 독수리가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순간 번쩍하고 광선이 튕겨져 나왔다. 독수리는 시력이 매우 뛰어나고 강한 햇빛 아래 사냥을 하거나 하늘을 날아야 하기 때문에 눈동자에 들어오는 빛의 양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눈을 보호하는 '순간 막'인 제3의 눈꺼풀을 가지고 있어서 이 투명한 막이 빛을 받으며 움직일 때, 인간의 눈에는 섬광처럼 보인다고 한다.
강렬한 햇살에 잎사귀들이 타들어가는 냄새일까. 땅에서 낙엽을 받아내고 있는 냄새일까. 가을 내음 가득한 주말,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는 서천에 있는 국립생태원을 찾았었다. 여기서 독수리를 실제로 만나고 나자, 게다가 날지도 못하는 독수리라니... 이후로 다른 동물들을 마주해도 이상하게 마음이 시들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 눈동자를 생각했다. 날개가 다치지 않았을 때의 기억은 남아 있을까,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현실에서 적응하고 있는 독수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 그저 생존하고 있는 것일까.
해남으로 이사 온 후로 나의 지도는 거꾸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땅 끝이 아니라 땅의 시작처럼, 다른 지역을 갈 때 위로 향해가는 감각이 아닌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는 감각으로 지역을 넘나든다. 서천에서 고창을 지날 때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석양은 조금 특별하게 다가온다. 유독 낮은 구릉이 많은 고창에서는 붉은 태양이 조금 더 오래오래 머물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저 길고 긴 태양빛이 우리 차를 밀어주고 있다는 착각의 착각을 거듭하며 충청남도, 전라북도 그리고 전라남도로 흘러와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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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이라는 뜻인 '미세마을'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다. 이제 8개월이 다 되어간다. 우리 가족 넷, 친구네 가족 셋, 친구네 부모님 이렇게 세 가정이 따로 또는 함께 지내고 있다. 집 셋 채가 있는데 그중 중앙부에 우리 가족이 살고 있다. 나는 그동안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인도 오로빌이라는 공동체, 경주, 양산을 거쳐서 해남까지 오게 되었다. 언젠가 북토크에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 안주라는 단어와는 꽤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말과 함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주해야 했던 이 낯선 행로의 공부들이 내게 어떤 새로운 모습을 알려주었는지 물었다. 나조차 몰랐던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날카롭고도 투명한 질문이었다.
"실은 나는 내 삶에서 안정감이 몹시 중요한 인간이다. 집순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집이라는 공간을 사랑한다. 그런데 어떤 변화에 따라 내면에서 뭔가 흔들림이 커지면 지금 여기서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의 새로운 모습이라면 내가 이토록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안정감을 추구하면서도 자유를 갈망한다. 경제적인 부분, 인간 관계, 삶의 가치관 등 나의 안정감이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내 마음의 안정감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나의 영혼이 살아 있다고 느낄 때, 내면의 목소리가 잘 들리는 상태가 원활하게 유지되는 환경이 나에겐 안정감을 주는 곳이다." 라는 말을 그럴싸 하게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가 처음 미세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추위가 감돌던 2월이었다. 손으로 일일이 쌓아 지었다는 돌집이 마치 파도가 한번 휩쓸고 간 모래성처럼 느껴졌다. 공간도 마치 자신이 품어야 되는 운명이 있고 사명이 있는 것 마냥 무언가 해야 할 일을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었다. 우리가 오기 전 이 마을은 도시에서 내려온 청년들이 농사 공동체를 꾸려왔다고 했다. 이제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파도가 치면 무너지는 걸 알면서도 쌓기를 반복했던 공동체라는 꿈은 어떻게 되었을까? 수수께끼같은 울음 소리를 내며 고양이들만 주변을 왔다 갔다 거렸다.
폐허 같은 집을 손으로 치우고 정리하면서 사람의 온기로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솔직히 이기적인 인간이기도 하고, 그동안의 경험으로 공동체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 마을에 왔을 때는 공동체라는 것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 하나 없이 그저 흘러온 것에 가깝다. 그저 느슨하고도 필요할 때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는 그런 관계를 바랐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살면 살수록 느껴지는 이곳의 독특한 문화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면서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이 마을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는 자들의 목소리에 의존해 이 마을이 거쳐왔던 여정과 굴곡을 간접적으로 지나오며 그들의 고운 마음 밭과 상처를 마주하게 되었다.
“듣기의 윤리란 무엇일까요? 듣기 이후의 행위를 보통 '후속 조치(Follow up)라고 합니다. 여기서 후 속 조치란 물질적 보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게 닿은 이상, 그 이전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태도를 갱신하는 것, 그것이 응답입니다. 타인에 의해 내가 변한 것입니다.” 정희진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창비, 2026
오랫동안 닫혀 있던 공간에 고여 있는 공기는 내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땅에도 고유한 결이 있듯이 이 마을에도 우리가 이사 오지 않았을 때 만들어진 깊은 우물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은 이상, 우리는 이전과 똑같이 살아갈 수 없었다. 파도가 치면 무너질 걸 알면서도 새로운 관계와 삶을 다시 쌓아 올려야 했다. 한마을에 함께 어울려 산다는 건 그저 자기 생존만을 위해 적응하는 삶은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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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에 선 감각의 여행] 해남, 미세마을에 살면서 마주하는 일상 속 내면의 지형도.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보다 비가시적 세계에서 더듬어 건져올린 감각과 느낌의 세계를 전합니다.
글쓴이 / 윤경 논과 밭, 산과 바다를 어슬렁거리며 자연 속에서 아이들과 성장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마음을 어루만지며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