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에도 사투리가 있다?!
판교어라니요?
“씨레벨 피드백 반영해서 아삽으로 디벨롭하고, 애자일하고 린하게 듀데잇까지 마무리해주세요.”
분명히 한국어인데 업계 사람이 아니면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바로 그 유명한 ‘판교어’다. 문장 구조를 보면 틀림없이 한국어다. 조사와 어미를 봐도 한국어가 틀림없다. 그러나 겉모습에 홀려 ‘으흠~ 한국어야 뭐 내가 원어민이지!’ 하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한국어의 탈을 쓴 외계어가 마치 랩 가사처럼 속사포처럼 귓전을 때리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버릴 테니 말이다.
이런 문장에 대한 반응은 대개 둘 중 하나이다.
첫 번째는 “아~ 경영진의 의견을 반영해서 최대한 빨리 개발하고, 민첩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마감 기한까지 마무리하라는 거구나!”라고 찰떡같이 알아듣는 부류다. ‘판교 사투리’라고도 불리는 판교어의 발원지인 판교 테크노밸리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IT 기업이나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 이 정도 문장은 식은 죽 먹기다.
이해를 돕기 위해, 위 문장에서 나온 용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씨레벨: 경영진(C-level)
아삽: 가능한 한 빨리(ASAP, As Soon As Possible)
디벨롭: 발전시키다(develop)
애자일: 민첩한(agile)
린: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인(lean)
두 번째는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난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어”라며 그냥 포기하는 부류다. IT와는 거리가 먼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어쨌든 외형은 같은 한국어인데 ‘판교어 번역기’가 존재할 정도니 ‘한국어 원어민’한테도 판교어의 장벽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그러니, 저 낯선 단어들의 콜라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주눅 들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조롱도 곤란하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니다. 먼저, 이해도의 측면에서는 중간쯤이다. 영어가 구석구석 들어가 있으니 대충 짐작은 하지만 정확한 의미는 알지 못하는 상태랄까? 다음으로, 판교어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절대적인 지지와 강경한 부정 그사이 어디쯤에서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는 정도다.
판교어를 마뜩잖게 여기는 사람들은 어쩌면 IT업계 종사자들이 쏟아내는 말을 ‘잘난 척하려는 허세 가득한 발버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어학에서는 특정 사회 집단 안에서 이런 ‘사회방언(sociolect)’이 생겨나는 것은 효율적인 의사소통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판교어 역시 마찬가지다. 서구에서 먼저 발달한 IT 중심의 스타트업 문화가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그들의 언어도 함께 넘어왔고, 관계자들은 정확하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만의 변종 언어를 받아들였다.
“한국어로 정확하게 번역해서 쓰면 되잖아요!”라고 따지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다. ‘사회방언이 정말 효율성을 높여주는 게 맞을까?’라는 의구심을 느끼면서 말이다. 물론, 대체 가능한 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말도 있다. 혹은, 영어를 그대로 쓰면 딱 한 단어면 되는데 한국어로 바꿔서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너무 긴 설명이 필요한 때도 있다. ‘린’이 그렇다. ‘린’, 영어로 ‘lean’은 단순히 효율적이기만 한 게 아니다.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해 비용을 절감하고,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인’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어떤가? 이 길고 긴 설명을 매번 집어넣는 것보다 그냥 ‘린’이라고 딱 한 단어를 내뱉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은가?
사회방언은 어느 업계에나 존재한다. 의료계, 법조계, 패션계, 방송계 할 것 없이 업계 종사자들만 알아듣는 은어가 없는 곳은 없다. 거기에다 사회방언은 업무와 소통의 효율성을 높여줄 뿐 아니라 공동체 정신을 강화한다. 사실 사회방언은 직업, 계층, 공동체의 경계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언어 현상이다. 자신들끼리 아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결속력을 다진다.
코크니 라이밍 슬랭, 범죄자들의 은어에서 사회방언으로
소수의 공동체 구성원들끼리 은밀하게 주고받던 은어가 널리 확산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코크니 라이밍 슬랭(Cockney Rhyming Slang)이다. 코크니 라이밍 슬랭은 1840년대에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에서 시작됐다. 원리는 단순하다. 실제로 말하려는 단어 대신 운율이 맞는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운율을 맞추기 때문에 ‘라이밍’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계단을 올라갔다’라는 뜻의 영어 문장 ‘I went up the stairs’에서 계단을 뜻하는 ‘stairs’ 대신 ‘stairs’와 운율이 맞는 ‘pears(배)’를 이용해 ‘apples and pears’라고 말하는 식이다. 심지어, 한 단계 더 나아가 계단을 얘기할 때 ‘stairs’와 운율이 맞는 단어인 ‘pears’를 뚝 떼어내 버리고 ‘apples’라는 단어만 쓰기도 한다. 정말이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절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감쪽같은 은어’ 아닌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남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쓰는 걸까? 맨 처음 코크니 라이밍 슬랭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이스트엔드 지역의 범죄자와 노점상들이었다. 경찰의 눈을 피해 거래하고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은밀하게 정보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런 은밀한 사회방언이 생겨난 것이다.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맥주(beers, 비어스)’ 대신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를 마시고, ‘진실(truth, 트루스)’ 대신 ‘베이브 루스(Babe Ruth)’를 좇고, ‘돈(money, 머니)’이 아니라 ‘벌과 꿀(bees and honey, 비즈 앤 허니)’을 번다고 말하는 이들의 언어생활은 흥미롭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이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주고받는 은어에서 출발한 코크니 라이밍 슬랭은 점차 노동계층의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이 반영된 언어로 발전했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와 같은 편인지, 어떤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지를 드러내는 사회적 표지이기도 하다.
판교어나 코크니 라이밍 슬랭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같다. 사람들은 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싶어 할까? 사회방언은 ‘우리가 같은 편’임을 증명하는 사회적 암호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우리들만의 판교어’가 있지 않을까? 학창 시절에 친한 친구들끼리만 사용했던 줄임말에서부터 가족끼리만 사용하는 농담까지. 그 언어를 알아듣고 사용하며 우리는 자연스레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러니 낯선 사회방언을 만났다고 무작정 조롱할 필요는 없다. 내게는 낯설지만,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친숙하고 다정한 사회 언어, 공동체 정신이 깃든 소중한 언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김현정
읽고 쓰는 삶을 좋아하는 번역가입니다. 주로 경제경영 서적을 번역하고, 가끔 제 글도 씁니다. 취미는 책 사들이기입니다. 한강 작가가 어딘가에 적어둔 ‘읽은 책보다 읽을 책이 많은 책장’이라는 글귀를 가장 좋아합니다. 오늘도 책을 향한 저의 짝사랑을 불태우며 당당하게 책을 주문합니다. 이상은 높고 실천은 덜 하는 편이지만, 두루 책이라도 읽어두면 언젠가는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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