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통계물리를 전공했다. 통계물리를 전공한 경우, 연구를 계속하는 게 아니라면 보통 전공과 관련 있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공대처럼 전공과 직무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지는 않기 때문에, 논리력이나 수리적 사고 능력을 보고 채용되는 느낌이다. 나의 커리어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했다.
대학원에서 그래프를 그릴 때에는 특이한 방식을 즐겨 썼다. 같은 이과인 남편도 생소하게 느꼈던 방식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남편의 말을 쉽게 이해했지만, 남편은 내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나는 그 방식을 쓸 일은 이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마케팅이라는, 어찌 보면 생뚱맞아 보이는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니, 더더욱 대학원에서 사용하던 관점과는 이제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멀어졌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나는 특이한 세계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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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마케팅 업무에서는 성과 측정을 위해 여러 도표를 활용한다. (출처: Unsplash의 Jakub Żerdzic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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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성과를 측정하기 위해 SNS 게시물들의 조회수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그런데 게시물마다 조회수 변동이 심했다. 어느 날은 조회수가 10회도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30만 회가 넘어가는 날도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전체 데이터를 한눈에 보기가 쉽지 않았다. 30만 회를 넘기는 날에 맞춰 그래프를 그리면, 작은 조회수는 잘 보이지 않았다. 막대그래프가 거의 바닥에 붙어 조회수가 있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작은 조회수에 맞춰 그래프를 조정하면, 조회수가 큰 날은 얼마나 게시물이 성공적이었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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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일반적인 방법으로 그린 조회수 그래프. 편차가 심해 한눈에 조회수를 파악하기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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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경우 그래프에서 한 칸 이동하면, 값이 덧셈으로 늘어난다. 그림 1에서 y축 위로 한 칸 이동하면 값이 50,000만큼 더해지고, 아래로 한 칸 이동하면 50,000만큼 줄어든다. 어느 방향으로 이동해도 값의 변화량은 동일하다. 하지만 그림 2처럼 y축에서 한 칸의 의미가 계속해서 변하는 방식으로 그래프를 그릴 수도 있다. 이런 방법은 아주 큰 숫자와 아주 작은 숫자를 한 번에 봐야 할 때에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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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곱셈 법칙을 적용한 그래프. 편차가 큰 숫자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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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에서 y축 한 칸의 의미는 계속해서 바뀐다. 제일 아래 칸에서는 값이 9 만큼만 변하지만, 맨 윗 칸에서는 값이 900,000 만큼이나 변한다. 여기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바로 곱셈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맨 아래 1에서 시작해서, 한 칸씩 이동할 때마다 10 만큼 곱해진다. 이렇게 하면 바닥에 붙어 제대로 보이지 않던 막대들의 키가 늘어난다. 덧셈의 세계(그림 1)에서는 너무나도 차이가 큰 나머지 작은 막대는 존재조차 알아차리기 어려웠지만, 곱셈의 세계(그림 2)에서는 차이가 줄어들어 나란히 두고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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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곱셈 법칙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유튜브에서 버튼을 수여하는 기준을 보자. 구독자 10만 명을 넘으면 실버 버튼, 100만 명을 넘으면 골드 버튼, 1,000만 명을 넘으면 다이아 버튼을 받는다. 덧셈이 아니라 곱셈으로, 매번 10배씩 늘어나야 다음 버튼을 받는다. 10만에서 100만이 되는 것과 100만에서 1,000만이 되는 것, 덧셈으로는 각각 90만과 900만의 차이지만 곱셈의 세계에서는 똑같이 한 칸이다. 이처럼 한 칸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할지를 수학에서는 scale이라고 부른다. 똑같은 값이더라도 스케일에 따라서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굳이 한국어 대신 영어 단어 scale을 먼저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scale은 한국어로 두 가지로 옮길 수 있다. 앞서 소개한 그래프처럼 한 칸의 의미를 정의하는 방식을 '척도'라고 부른다. 그림 1은 덧셈 척도로, 그림 2는 곱셈 척도로 그린 그래프이다. 반면 '축적'이라고 옮기는 경우는, 한 칸의 크기가 어디서나 똑같다. 지도에서 축적은 실제 세상을 얼마나 작게 줄였는지 알려준다. 1:50000 지도라면, 지도 위 어느 위치에서든 1cm는 실제 거리로 500m를 의미한다. 위치에 따라 그 비율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지도에서의 축적처럼 한 칸이 동일한 기준으로 정의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고, 덧셈을 기준으로 정의하는 편이 직관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곱셈 척도가 좀 헷갈리기는 해도, 분명 유용한 면이 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조회수 같은 성과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만든 모든 콘텐츠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조회수가 10회도 나오지 않은 게시물이나, 예상치 못하게 30만 회를 넘긴 게시물이나, 나에게는 모두 소중하다. 그러니 크고 작은 숫자들을 동일한 화면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곱셈 척도가 나에게는 꽤 유용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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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나는 전공을 살려 취직하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정도면 그래도 전공과 연관성 있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더욱이 내가 대학원에 진학할 때 가장 흥미를 느꼈던 부분이 바로 이 곱셈 법칙의 세상이었다는 걸 떠올리면, 대학원 생활이 의외로 헛발질은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보면 인생은 점묘화 같다. 점을 찍을 때는 점을 찍는 데 몰두하느라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에는 그때 가진 물감으로 그저 온 힘을 다해 점을 찍을 뿐이다. 점의 색깔도, 크기도, 모양도 당시에 어떤 인생을 살아냈는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점을 찍을 당시에는 이 점이 전체 그림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계속해서 점을 찍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때가 온다. 그러면 따로따로 찍었던 점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대학원에서 익힌 곱셈 법칙도 그렇게 찍어둔 점 하나였다. 마케팅이라는 전혀 다른 색의 점들 사이에서, 그 점은 우연히 대비를 이루며 그림에 입체감을 더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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