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 희망이 다양한 편은 아니었다. 성악가가 되고 싶었던 시절도 있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나는 물리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되겠거니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밖에 다른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딱히 들지 않았다. 공부하다 보니 물리에 재미를 붙였고, 아마 계속 물리를 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 마음은 꽤 굳건했다. 음악은 취미로 하라는 엄마의 말에 성악가라는 꿈은 쉽게 저버렸지만, 쓸모가 많은 생물이나 화학을 하라는 엄마의 말에는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지금 나는 마케터가 되어있다. 물리학과 마케팅이라니 어찌 보면 생뚱맞아 보이기까지 하는 조합이다.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지만, 모두 나를 설명하는 단어들이다.
막연히 박사가 되겠거니 싶은 마음으로 진학했던 대학원에서, 나는 연구와 그렇게 잘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석사 학위로 졸업한 뒤에는, 비영리 사단법인에서 일을 했다.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궁금했다. 하지만 사회적인 가치를 다루는 곳이다 보니, 내가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추상적이고 수치로 환산하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데이터 분석가로 전향했다. 그런데 막상 취업하고 나니, 맡게 된 일은 마케팅이었다.
마케팅은 흔히 감각이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마케팅을 맡아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검색 결과 상단에 노출되고, SNS 피드에서 추천되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알고리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게다가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내가 원래도 즐겨 하던 일이었다. 영상 편집 툴로 브이로그를 만들고, 에세이 뉴스레터를 연재하고 있다. 마케팅 업무는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내 길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매번 새로운 길을 탐색할 때도 동일하게 생각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길을 찾아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수도 없다. 언젠가는 한 직무에 자리를 잡고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로 아무것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될 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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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최근 마케팅에서는 SNS의 알고리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출처: Unsplash의 Adem 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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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언제 멈추는 게 가장 적당할까? 항상 이번만큼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진짜 내 길이 맞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람의 성향과 적성, 직무의 특성에 따라서 분석하는 검사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진로 적성검사에서도 어느 직업을 콕 집어서 이야기해 주지는 않는다. 대략 이런 분야에서, 이런 특성을 가진, 예를 들면 이런저런 직업이 알맞다고 이야기해 줄 뿐이다.
처음에 시도한 길이 잘 맞을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 성향에 따라 처음 직장이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적당히 안착하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 같이 계속해서 떠도는 사람은 도대체 언제 멈추어야 하는 걸까? 놀랍게도 수학자들은 이런 문제도 증명해 냈다. 최적 정지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원래는 회사가 사람을 뽑는 문제에서 출발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내가 회사 또는 직무를 고르는 문제로도 생각할 수 있다.
어떤 회사가 100명의 지원자를 면접한다. 모집인원은 단 한 명이고, 이번에 꼭 채용해야 한다. 지원자를 순서대로 면접하고, 합격 여부를 바로 알려줘야 하며, 한 번 탈락시킨 지원자는 다시 부를 수 없다. 면접 초반에는 아무리 좋은 지원자가 있어도 면접관은 망설이게 된다. 뒤에 더 좋은 지원자가 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 말이다. 하지만 면접이 끝나갈수록 면접관은 초조해진다. 괜히 이전에 지나쳤던 좋은 지원자가 떠오르고, 앞으로는 그런 지원자가 없을 것 같다. 이러다가 아무도 채용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결국 눈앞의 지원자를 합격시키는 수밖에 없다.
최적 정지 이론은 이런 상황에서 몇 번째 지원자에서 멈추어야 가장 좋은 지원자를 뽑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 수학자들이 내놓은 답은 이렇다. 처음 37명의 지원자는 무조건 탈락시킨다. 실제 채용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어떤 지원자를 합격시켜야 할지 기준을 세우기 위해 면접을 보는 것이다. 38번째 지원자부터는 지금까지 본 사람 중 가장 나은 지원자가 나오는 순간 바로 채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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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최적정지이론은 회사가 면접을 볼 때 언제까지 탐색을 하고, 언제부터는 멈춰도 좋을지 알려준다. (출처: Unsplash의 Mina R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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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의 직무 찾기 문제에 최적 정지 이론을 대입해 보자. 내가 앞으로 살면서 100개의 직무를 경험한다면, 최소한 37개는 무조건 맛만 보고, 38번째 직무부터 진지하게 고민해야 의미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중대한 문제가 있다. 내가 살아가면서 몇 개의 직무를 탐색할 수 있을지를 모른다. 정말로 100개를 모두 탐색할 수 있을지, 아니면 지금껏 탐색한 직무가 최대치였을지 아무도 모른다.
이미 선택의 기회가 지나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결정의 순간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을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인생을 끝까지 살아봐야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심지어 내가 중간에 멈춘다면 그 뒤에 몇 개의 직무가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영영 알 길이 없다.
문제를 살짝 비틀어서 숫자를 예상할 수 있는 문제로 치환해 보자. 수학적으로 엄밀하지는 않더라도, 대략 셈을 할 수 있는 문제로 만들어보려는 시도이다. 요즘은 평균 수명 100세 시대이다. 100개의 직무 대신에 나이로 치환해서 생각해 보자. 최적 정지 이론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37세까지는 탐험을 해도 괜찮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만으로 34세이다. 그러니 앞으로 최소 3년의 유예기간을 확보한 셈이다.
물리학에서 시작해서 마케팅까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계속 떠돌다가는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엉터리 계산이지만 최적 정지 이론을 적용해 보니, 아직은 마음을 놓고 탐험해도 괜찮겠다. 물론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내가 몇 살에 생을 마감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하지만 애초에 엉터리로 적용한 문제이니, 수명을 예상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렇게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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