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을 하면 몸은 ‘몸뚱아리’가 된다. 수영이나 요가가 하루의 낙이었던 인간이, 집 앞 마트에 가는 것조차 헉헉대며 남편의 부축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300여 일의 임신 기간은 어떻게든 견뎌내야 하는 퀘스트가 된다. 태교는 개뿔.
어쨌든 살아야겠고, 최소한의 체력은 길러둬야겠으니 16주 안정기가 되자마자 하루 목표를 정했다. ‘매일 6,000보 걷기’. 달성하는 법은 단순하다. 일단 스마트폰이나 워치를 차고 집 밖으로 나갈 것. 임부복 당근마켓 거래를 하러 가거나, 요거트를 사러 마트에 가거나, 코앞 분리수거장만 두어 번 왕복해도 1,000보는 뚝딱이다.
만약 어제 9,000보를 걸었다면? 오늘은 3,000보만 걸어도 이틀 평균 6,000보를 채운 셈이니 성공이다. 이 정도의 뻔뻔한 아량은 장착해야 장장 사계절의 임신 기간을 버틸 수 있다.
도저히 걷기 싫은 날도 있다. 침대 밖을 벗어나기도 싫고, 배달 음식 도착시간만 보고 있는 스스로가 지긋지긋한 날. 지난달 걸음수 기록을 쭉 내려보니 1,000보도 채우지 못한 날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아마도 하루종일 누워서 핸드폰만 보던 날이었겠지.
예전 같았으면 "왜 이렇게 우울할까, 왜 이것밖에 못 할까" 자책하며 땅굴을 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를 미워하는 건 이제 그만이다. 어린 아기 대하듯, 스스로를 변호해 본다.
한 달 치 걸음수를 다 더해서 평균을 내보니, 며칠 누워 있었다고 해서 전체 그래프엔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걸음을 걷지 않은 시간에도 내가 가만히 증발해버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걸음수를 채우지 못한 날에는, 그만큼 ‘누움수’와 ‘뒹굶수’를 성실하게 쌓은 거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누움수와 뒹굶수 채우는 Tip
냅다 침대에 눕기 스마트폰은 멀리 던져둬도 좋음(하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일 때마다 무언가가 차곡차곡 적립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 잠들었다 깬 시간은 귀중한 기절수로 인정해 주기
중력을 견뎌야 하는 지구인 중에서도, 무거운 배를 안고 있는 나로서는 매일같이 6,000보를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공이나 실패같은 딱지를 붙여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않기로 했다.
마침 오늘은 호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려 했지만 비가 왔다. 집에서 스트레칭이라도 하려 했지만 꼬리뼈가 아파서 쿨하게 파업을 선언했다. 대신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서 누움수와 뒹굶수를 성실하게 채웠다. 걷지 않아도, 이만하면 성실한 태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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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명 - 서나연
*코너소개 - 몸이 단단해져야 마음이 마음껏 약해질 수 있다고 믿기에, 강해지는 몸의 감각과 약해지는 마음의 물성을 매달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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