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나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대장부인 줄 알았다고 했다. 자기주장과 원하는 것이 분명한,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연애를 시작하고 알게 된 내 모습은 사뭇 달랐다. 당차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내면 깊숙한 곳에는 온갖 불안과 걱정이 자리하고 있다. 생각이 많고 예민하기까지 하다.
나는 특히 청각이 예민하다. 어릴 적부터 내 방에는 시계를 두지 않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거슬렸다. 손목시계에서 나는 작은 소리도 거슬려, 초침이 없는 시계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각이 예민한 것에 더해, 이런 소음이 신경 쓰이고 불편하다. 흡음 설계가 안 되어 소리가 울리는 공간에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차 소리가 시끄러워 대로변에서 한 골목 들어간 길로 걸어 다닌다. 반면 남편은 무던한 편이다. 가습기 소리 조차 거슬려 잠들지 못하는 나와 다르게, 남편은 어떤 소리에도 쉽게 잠든다.
남편은 내게 속아서 연애를 시작했다. 하지만 결혼은 나의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을 모두 알게 된 뒤에 결정한 일이다. 누군들 상대방과 한평생 함께하겠다는 결정이 쉽겠느냐마는, 남편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남편은 자신이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도 나의 예민함을 너른 마음으로 품어줄 각오를 단단히 먹어야 했다.
만약 남편이 나를 처음 봤을 때 나의 예민한 성격을 먼저 발견했다면, 어쩌면 우리는 결혼은커녕 연애도 하지 못했을 테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대장부라고 착각했다. 남편이 내게 속았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편은 이미 내게 빠져버린 뒤였다. 이과 개그 코드를 비롯해, 대화 주제의 3대 금기로 여겨지는 정치, 종교, 젠더까지도 거리낌없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상대는 쉽게 찾을 수 없으니 말이다. 남편이 내게 속아준 덕분에 나는 나의 생떼를 받아주는 든든한 안정형 남편을 얻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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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남편은 나의 까탈스러운 성격을 알고난 뒤에도 내 손을 잡아주었다. (출처: Unsplash의 Đăng Hữ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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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사회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에게는 뼈 때리는 촌철살인도 마다하지 않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나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굳이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소개팅이나, 면접처럼 상대방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자리에서는 가면이 더욱 두꺼워진다. 나도 상대도 가면을 썼지만, 가면 이면의 진짜 모습을 알아내려는 치열한 눈치 싸움을 동반한다. 나의 가면이 두꺼워질수록 상대의 가면도 두꺼워지고, 그렇게 가면이 두꺼워질수록 허울뿐인 관계만 남게 된다.
분명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가면이었는데, 가면이 너무 두꺼워지면 오히려 본질을 잃게 된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견제하며 핵무기를 늘려갔다. 한쪽이 무기를 늘리면, 상대도 따라 무기를 늘렸다. 분명 애초의 목적은 각 국가의 사상과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군비 경쟁이 심화할수록 경쟁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 견제가 늘어날수록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었고, 세계는 안전해지기는커녕 더욱 위태로워졌다.
이런 긴장 상태가 해소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어느 한쪽이 먼저 무기를 내려놓고 손을 내밀어 협상에 이르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일이다.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은 쉽지 않다. 협상의 의지를 내비치며 먼저 무기를 내려놓을 때는 그 틈을 상대가 노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누군가 먼저 용기를 내고 상대가 그 손을 잡아줄 때, 비로소 아름다운 합의로 양쪽 모두가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용기 있는 선택으로 대치 상태가 종결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은 소련이 내부에서 붕괴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소련의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두 체제 간의 긴장을 해소한 셈이다. 사람 사이의 가면도 마찬가지이다. 용기 있는 선택으로 먼저 가면을 내려놓기도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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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가면을 내려놓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출처: Unsplash의 Tamara Ga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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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좋은 시절만 있을 수는 없다. 힘든 시기가 오면 좋은 모습만 보여주기 어렵고, 예상치 못하게 견해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평소에는 가볍게 넘길 일도 괜히 서운하게 느껴진다. 결혼을 준비하고 양가를 대하는 과정에서 가족에 대한 인식, 관념이 충돌하면서 갈등을 겪기도 한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크고 작은 일들을 겪다 보면, 가면 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가면 뒤에 숨겨져 있던 아름답지만은 않은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남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의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속내를 알고도 나를 나무라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배려해 주었다. 나와 걸을 때는 기꺼이 차 소리가 덜 들리는 경로를 택했고, 시끄러운 공간에 가면 내가 괜찮은지 먼저 물어봐 주었다.
더 나아가 남편은 자신의 부족함을 선뜻 내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부족하므로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주었다. 남편이 먼저 용기를 내준 덕분에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의 가면 뒤 모습을 남편이 싫어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나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다음에도 나에게 ‘괜찮다’라고 말해주었다.
남편은 내게 속았다. 하지만 내 진짜 모습을 알게 된 다음에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가면 뒤에 숨겨진 모습을 알고 나서도 오히려 나를 이해해 주고,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남편이 내게 속아준 덕분에 나는 속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얻었다. 가면을 벗어도 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갈 든든한 뒷배를 얻은 기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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