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자리가 바뀌었다. 숫자로만 따지면 최근에 늘어난 1 kg의 몸무게보다 지난 몇 년간 야금야금 오른 10 kg의 무게가 더 크다. 하지만 분명 더 적은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앞자리가 바뀐 몸무게를 확인하자 내 머릿속에는 경보가 울렸다. 물론 지난 몇 년간 조금씩 불어나던 무게가 신경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자리가 바뀌는 것만큼 경각심을 심어주지는 못했다. 이상하다. 지난 몇 년 동안은 마치 무게가 거의 변하지 않은 듯이 굴다가, 1 kg의 변화로 갑자기 몸무게가 바뀐 듯이 굴다니.
나이를 따질 때도 마찬가지다. 한국 나이로는 30살이지만, 만 나이로는 아직 20대인 시절, 나는 어떻게든 만 나이를 고집했다. ‘서른이면 뭐라도 될 줄 알았지’라는 정보영 작가의 에세이집처럼 나는 30대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29살과 30살이 뭐 그리 다르다고. 공자는 30세에 뜻을 세웠다고 했는데, 나는 여전히 학생이었다. 대학원에서 뜻을 세우기는커녕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 졸업은 언제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람의 나이라던지, 몸무게의 변화는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몸무게의 앞자리는 어느 날 갑자기 바뀌지 않았다. 더 먹고 덜 움직인 나의 생활이 누적되어 차근차근 변화가 일어났다. 사실 9와 10의 차이는 1과 2의 차이와 다르지 않다. 스물한 살에서 스물두 살이 되는 것과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 살이 되는 데에는 똑같이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29살과 30살 사이에는 아직은 도전하고 탐험해도 되는 20대와 이제는 갈 길을 정하고 어른의 모습을 갖춰야 할 30대만큼의 간극이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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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연속적인 자연에 경계를 긋고 구간을 나누었다. 12월 31일 밤 11시 59분 59초와 1월 1일 새벽 0시 0분 0초는 고작 1초의 차이로 년, 월, 일, 시간까지 모든 것이 바뀐다. 고작 1초의 차이로 사람들은 새해가 밝았음을 선포하고,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울린다. 엄밀히 따지면 1초도 안 되는 시간의 차이이다. 1초도 사람이 정의한 시간의 흐름이기에, 더 세밀한 단위로 쪼개질 수 있다. 단거리 육상, 수영, 스피드 스케이팅 같은 종목에서는 0.01초 차이로 승부가 가려지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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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무지개는 흔히 빨주노초파남보의 색으로 이루어진다고들 한다. 그림을 그릴 때에는 색깔마다 명확한 경계를 만들지만, 사실 무지개의 색깔은 연속적으로 변한다. (출처: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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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지각 세계도 연속적이지만, 사람은 여기에도 경계를 부여했다. 보통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 빛깔을 가졌다고 한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각 색깔의 경계를 뚜렷하게 불연속적으로 그린다. 하지만 실제로 무지개를 보면, 색깔 사이에 경계가 뚜렷하지는 않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도와 레 사이에는 사실 셀 수 없이 많은 음정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서양 음악에서는 도와 레 사이에 도#/레b에 해당하는 음 하나만 허용한다. 서양 음악의 기준이 절대적이지도 않다. 서양 음악에서는 한 옥타브를 12개의 음정으로 나누지만, 인도 음악에서는 22개의 음정으로 나눈다. 같은 소리의 세계이지만 음계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또 다른 음악의 세계가 펼쳐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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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연속적인 자연에 구간을 나누고 경계를 세움으로써 통일된 기준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첼로, 오보에, 트럼펫까지 수십 개의 악기가 함께 연주할 수 있는 이유는 모두가 같은 기준으로 조율했기 때문이다. 440 Hz 진동수를 가진 라 음을 기준으로 연주한다는 합의가 없다면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음악보다는 소음에 가까울 테다. 모두가 같은 기준을 쓰기로 합의했을 때, 비로소 12월 31일 자정에 함께 카운트다운을 할 수 있고, 아름다운 음악도 탄생한다.
색깔에도 마찬가지로 합의가 필요했다. 팬톤은 색에 공통된 기준을 부여함으로써 디자이너와 인쇄업자가 같은 색을 두고 서로 다른 말을 하는 혼란을 없앴다. 팬톤은 색을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고, 매년 올해의 컬러를 선정해 발표한다. 2026년 올해의 컬러는 '클라우드 댄서'라는 이름의 팬톤 11-4201이다. 나는 구름이나 눈이 가장 깨끗한 하얀색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팬톤의 색상 전문가들은 다르게 본다. 자연에 존재하는 하얀색은 순백보다 미세하게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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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2026년 팬톤이 선정한 올해의 컬러, 클라우드 댄서(출처: Panto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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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팬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흰색 세 종류와 (왼쪽에서 세 번째) 2026년 팬톤이 선정한 올해의 컬러, 클라우드 댄서. 구름의 흰색은 순백보다 조금은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다.(출처: Panto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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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는 이처럼 객관적 진리가 아닌 사람들의 합의로 만들어진 기준을 상호주관성이라고 부른다. 무지개의 경계도, 자정의 카운트다운도, 몸무게 앞자리도 따지고 보면 상호주관성의 산물이다. 자연에 원래 있던 선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그렇게 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합의로 만들어진 기준이 마치 본래의 자연인 양 착각하면 문제가 생긴다. 자연은 그저 연속으로 흘렀을 뿐인데, 나는 내가 그어놓은 선에 걸려 넘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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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을 앞두고 나는 만 나이를 고집하며 20대라는 선 안에 머물기 위해 버텼다. 29살이나 30살이나 일 년 아니, 어쩌면 고작 하루의 차이였는데, 그 선 하나가 주는 무게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내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30대가 되어도 여전히 방황 중이라는 점은 동일했지만, 20대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다. 무엇이 나와 맞고 맞지 않는지, 또 나는 어떤 사람인지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경계 하나를 넘었다고 갑자기 어른이 되지는 않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나이를 먹는 일이 걱정되었다. 나이만 먹고 성숙하지 않을까 봐, 어른이 되지 못할까 봐, 나이에 걸맞은 사람이 되지 못할까 봐. 하지만 이제 나이를 먹을수록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어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앞자리가 바뀐다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지도 않고, 앞자리가 그대로라고 해서 변화가 없지도 않다. 변화는 경계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 과정에서 일어난다.
다시 글의 시작으로 돌아가자면, 몸무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10 kg만큼의 무게가 늘어나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온 변화인 것이다. 그러니 몸무게 앞자리가 바뀐 날도,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일종의 경계를 넘었을 뿐이다. 나이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변했다기보다는, 조금씩 달라지고 조금씩 무거워져 현재의 상태에 도달했을 테다. 아마 지금도 나는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겠지.
그러니 살을 빼기는 빼야겠다. 이대로 가다간 숨쉬기 불편한 바지가 하나 더 늘어날 형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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