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떠나보낸 너희에게
육아와 자아 사이_노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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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속상하고 아쉽고 미안한 나의 마음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이 너희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아직도 너희를 하나둘 만나던 날의 설렘을 잊을 수 없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어. 정말 피하고 싶었던,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인데 말이야.
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새롭게 찾은 우리의 보금자리는 휑했어. 살림살이를 다 새로 채워야 했지. 사실 텅 빈 집보다 더 비어 있었던 건 나의 마음이었어. 짝꿍의 일 때문에 낯선 도시에 정착하며 마주한 외로움. 지금 생각해 보면, 번아웃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내 일을 잠시 내려두어야 했던 허전함도 한몫했던 것 같아. 아무튼 새로 구한 집에서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공간은 거실 창가였어. 폭이 한 50cm 정도 되는, 타일 같은 소재로 마감된 창가 바닥은 누가 봐도 너희를 위한 자리였지. 집주인에게 감사한 마음마저 들더라니까.
그렇게 나는 당연한 듯 너희를 하나둘 맞이하기 시작했어. 당장 필요한 가전, 가구를 들이기도 전부터 말이야. 아, 오해는 하지 말아 줘. 너희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야. 오히려 너희는 내가 평온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새 터전을 꾸며나갈 수 있게 해주는 훨씬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니까 말이야. 아마 제일 처음은 갈리와 테리였을거야. 아주 직관적이고 원초적인 이름을 지어놓고서, 스스로 뿌듯해하던 생각이 나.
사람들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쇼핑하듯, 나는 주기적으로 너희를 하나둘 들였어. 집들이를 하거나 선물을 받을 일이 생길 때면 역시나 너희를 부탁했고, 여행길에 전통시장에 들르게 되면 기념품처럼 꼭 하나씩 데려왔어. 그렇게 여리, 셀리, 아리, 달리, 로리, 올리, 마리까지 모두 함께 살게 되었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따뜻한 물을 한 잔 들고 창가로 가서, 어제와 또 다르게 자라난 너희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어. 집안에 우리 말고 생명이 있다는 기분, 생기와 온기 가득한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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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생명, 유자가 찾아왔어. 너희를 돌보는 일은 아기를 품고 있는 나에게, 고로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도 참 즐거운 일이었지. 유자가 태어난 후에도 여전히 너희는 기쁨이었어. 너희 옆에 둔 의자에 앉아 수유하면서 한번 쓱 바라보는 일, 수면 부족으로 지치고 힘들 때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일이 아주 큰 위로가 되어주었거든. 하지만 유자가 자라면서 나는 점점 걱정되기 시작했어. 이 평화로운 공존이 곧 끝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몰려들기 시작했지.
아니나 다를까, 어느덧 유자는 수유 의자에서 손을 뻗어 잎을 뜯을 줄 알게 되었고, 기어가서 자갈을 입에 집어넣을 줄 알게 되었고, 그러다 어느 날은 너희를 붙잡고 일어서는 시도를 하기도 했어. 너희에게도, 유자에게도 위험한 일이었지. 결국 며칠을 고민한 끝에 너희를 안방 베란다로 옮기게 되었어. 속상한 마음으로 옮기면서도 여전히 잘 돌봐주겠노라 스스로 다짐했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이 참 맞더라. 주로 거실에서 유자와 하루를 보내다 보니 너희를 잊는 날이 많았고, 또 점점 요구사항이 많아지는 아기에게 온 신경을 쏟다 보니 여력도 없었어. 구차하지만 진실인 핑계를 하나 더 대자면, 사실 이미 너무 초라하게 시들해진 너희를 못 본 척하고 싶었어. 유자가 있기 전 내 일상의 아주 큰 부분이었던 너희가 말라가는 모습을 보면, 꼭 내 삶의 한 부분이 사라져가는 것 같았거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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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래, 너희가 더 잘 알지. 이렇게 결국 너희를 잃고 말았네. 정말 미안하고, 정말 고마웠어. 어쩌면 고마웠던 마음이 너무 커서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리고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뱃속에서부터 함께 해준 너희 덕분에 유자는 꽃을 참 좋아하는 아기로 자랐어. 여전히 뭐든 입으로 가져가고, 길에서 만나는 풀잎이며 꽃을 일단 뜯고 보지만, 이제 자기 몸도 잘 가누고, 말귀도 많이 알아듣고, 무엇보다 자연에서 놀 때 가장 행복해 보이는 아기로 크고 있어.
그래서 얼마 전, 나는 큰맘 먹고 새 친구들을 들였어. 따뜻해지는 봄 햇살에 나도 모르게 용기가 생겼나 봐. 아몬드페페, 트리안, 휘토니아를 들였는데, 아직 이름은 짓지 않았어. 아마도 너희를 추억하면서, 페리, 트리, 토리 정도가 되겠지? 참, 어느 환경단체를 통해 우리밀 씨앗도 분양받아서 심어보았어. 유자와 함께 시도해 봤는데, 결국 온 거실이 흙투성이가 되고 난리가 난 거 알아? 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성급한 시도였어. 그래도 물주는 일 만큼은 유자와 늘 함께하고 있어. 유자가 먼저 분무기를 가지고 와서 책꽂이 위에 놓인 새 친구들을 가리키거든.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기특한지 몰라.
나는 유자를 얻으며 너희를 잃었지만, 덕분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함께 좋아해 주는 친구가 생겨서 너무 행복해. 결국 또 너희에게 큰 빚을 진 셈이 되었네. 함께하는 내내 나에게 더없는 위로와 평안을 주고, 우리 유자에게는 집사가 되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어서 정말로 고마워. 유자와 함께 페리, 트리, 토리, 또 앞으로 만날 수많은 친구를 건강하게 잘 돌보면서, 다시금 초록의 기운으로 가득한 우리의 삶을 잘 꾸려 볼게.
뱅갈고무나무 갈리, 테이블야자 테리, 여인초 여리, 호프셀렘 셀리, 아랄리아 아리, 자주색달개비 달리, 크로커스 로리, 올리브 올리, 마오리소포라 마리야. 이제 정말,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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