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SNS에서 이런 글을 보고 실소가 터져나왔다. 종부세를 내야하는 자산가가 되고 싶고 샤넬백을 하찮게 여길만큼 부유해지고 싶다는 뜻이었다. 만약 전용기로 여행하고 최고급 호텔 서비스를 누리며 돈을 펑펑 쓰는 일주일을 보낼 수 있다면 어떨까? 사양할 사람이 있을까?

영화 <아노라>의 주인공 아노라는 그런 일주일을 보냈다. 아노라는 뉴욕의 스트리퍼였다. 그녀는 일하면서 재벌 2세인 이반을 만났고 그의 독점적인 섹스파트너가 되었다. 죽이 잘 맞았던 둘은 충동적으로 결혼했고 아노라는 잠시나마 부유한 삶을 맛보았다. 비록 결혼하자마자 이반의 부모가 둘을 이혼시키는 바람에 짧은 단꿈으로 끝났지만 말이다.

상류층 부모가 자녀의 하층 계급 출신 교제 상대를 반대하는 건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미 숱하게 반복되어 왔던 이야기다. 아노라도 그에 걸맞은 수모를 겪었고, 신분 상승의 꿈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엄청난 후유증과 상실감,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노라는 이반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반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얻고자 했다. 우연히 손에 행운이 들어왔고, 들어온 행운을 잡았고, 그 행운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아노라를 비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아노라였어도 기회를 잡고 싶었을 것이다.

아노라는 실패한 것일까? 그녀는 이반과의 결혼에 실패했고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4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가 남았다. 4캐럿이면 대략 1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 아노라가 받은 모욕과 그녀가 겪은 고통을 차치하고, 돈만 아는 인간인 나는 결과적으로 아노라가 일주일 남짓한 기간에 1억을 번 셈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일주일 동안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마지막에 4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손에 쥔 것은 생각해보면 남는 장사가 아닌가. 만약 누군가가 "일주일 동안 이 난리를 치르는 대신 1억 원을 주겠다"고 한다고 해보자. 지원자가 몰릴 것이다. 물론 아노라가 이 일 때문에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너져서 삶의 모든 의욕을 잃었다면 당연히 금전적 손익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아노라를 비롯한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이 자본주의의 질서를 따를 때, 돈의 논리를 거스르는 선택을 한 인물이 있었다. 이반의 부모가 고용한 하수인의 하수인이었던 이고르였다. 이반이 아노라에게 결혼반지로 줬었지만 난리통에 빼앗겼던 4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다시 훔쳐서 아노라에게 건넨 인물.

이고르는 충분히 그 반지를 가질 수 있었다. 이반과 그의 부모에게 그 반지는 그들이 신경 쓸 만큼 비싼 물건이 아니었고, 아노라 또한 반지를 다시 찾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고르는 아무도 모르게 반지를 가질 수 있었지만 아노라에게 주기를 택한다.

그러나 아노라는 이고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고르가 아노라에게 반지를 돌려줬을 때 그녀는 그에게 마음이 열렸지만 그와 키스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이반과는 거침없이 키스를 했지만 이고르와는 하지 못한다. 이고르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원래 계급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고르는 아노라와 같은 하층민이었고 가난했다. 그가 아노라에게 준 반지는 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큰돈이었다.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에 그는 손에 들어온 돈을 놓는 결정을 내렸다. 이고르처럼 돈이 아닌 다른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 그가 단순히 이타적이거나 선량해서가 아니라, 나와는 다른 사고 체계를 갖고 있는 것 같아서다. 그는 돈보다 양심과 인간적인 연결을 택했다. 그 선택은 어리석었다. 그리고 숭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