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과거를 삼켜낼 준비가 된 어느 아침에
어린 시절의 상처를 회복하지 않으면 삶은 견디기 힘든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가끔 삶은 생각보다 너무 싱겁다.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만이 전부일까 싶다.
빚 문제로 힘겨워하던 날들이 전생처럼 느껴지던 어느 늦겨울이었다. 나는 둘째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다. 도저히 그럴 리 없던 일이 일어났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잠깐, 나는 새하얀 기쁨을 느꼈다. 스스로가 좀 우습기도 했다. 이제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 결혼 생활은 해도 해도 적응이 안 된다 같은 고민들이 무색하게도.
갑자기 녹는 마음 앞에서, 무엇이 이미 봄이었나 하고 작은 탄성을 냈던 것 같다.
어떤 시인은, 시란 사건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사후(事後)에 쓰이는 것이라 했다. 나는 이것이 종종 삶의 진리라고 느껴진다. 내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것.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기쁨들 한가운데에 이미 내가 서 있다는 것. 그 속에서 과거의 무거운 고민들은 그저 '고민'이라는 이름표만 단 채 흩어진다.
빚 문제로 허덕이던 그 계절에는 차마 쓸 수 없었던 언어들을, 삶이 싱거워진 지금에야 곰국 끓이듯 적어 내려가는 거라면, 뜨거운 과거를 삼켜낼 준비가 된 것이라고 말해 보아도 될까.
아침에는 머리를 감았다. 그 소란했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다짜고짜 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감는 일은 일종의 희망이다. 특히 아침에 머리를 감는다는 것은.
하루의 끝에, 먼지 묻은 머리를 씻어내고 깨끗한 잠자리에 눕는 것이 아니다. 이제 온 세상을 돌아다닐 머리를, 외출에 앞서서 정돈하는 것이다. 자기 전에 머리를 감는 일이 나를 위한 일이라면, 아침에 머리를 감는 일은 남을 위한 일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전자가 아무도 보지 않는 나만을 위한 깨끗함이라면, 후자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돈의 목적이 아닐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씻어내는 일조차 나를 위한 것과 남을 위한 것으로 나누려 했던, 숱한 이분법들에서 벗어난다면 어떨까.
완벽하게 치유된 마음과 망가진 마음, 진짜 사랑과 의무적인 사랑, 내 몫의 삶과 타인을 위한 삶. 세상을 그렇게 무 자르듯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둘째를 품고 기르는 엉망진창의 날들 속에서 배우고 싶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의식은 희미해지고, 표정이 더 선명해지기를. 원칙을 지키는 사람 보다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기를. 젖은 머리를 만지며 생각한다.
작가명 - 서나연 코너 제목 - 강해지는 몸, 약해지는 마음 코너 소개 - 5년간 요가를 가르쳤고 지금은 주 3회 물살을 가르는 수영인, 그리고 시를 읽으며 자주 우는 엄마의 기록입니다. 몸이 단단해져야 마음이 마음껏 약해질 수 있다고 믿기에, 강해지는 몸의 감각과 약해지는 마음의 물성을 매달 전합니다. 작가 소개 - 문예창작을 전공했고 요가 강사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수영에 빠져 사는 엄마이자 작가입니다. 세상에 다치지 않으려 운동하고, 세상에 닿고 싶어 글을 씁니다. 저서로 『전지적 언니 시점』(공저), 『공부가 좋아서』(공저)이 있으며, 2025년부터 글쓰기 모임을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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