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쩔쩔매며 살아간다
물리의 시선, 노다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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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다 보니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그만둔 일도 많다.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고, 물리학 전공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과정을 마쳤다.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다가 데이터 분석으로 커리어를 바꾸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 길을 거쳐오다 보니, 커리어에서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계다.
오랜 방황 끝에 방향을 잡았으니 이제 다른 걱정은 없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한 가지 고민이 생겨났다. 바로 출산에 대한 고민이었다. 헌신짝도 짝이 있다는 말처럼 이리저리 헤매던 나도 인생을 함께 살아갈 동반자를 만나 결혼하게 됐다. 사실 아이는커녕 결혼 생각도 없던 나였지만, 남편을 만나 여러모로 생각이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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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인생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그 중 어떤 길을 택할지, 중간에 어떤 길로 방향을 틀지 선택하며 살아간다. (출처: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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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내가 인생을 너무나도 힘겹게 느꼈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남편 덕분에 나도 조금씩 바뀌었다. 남편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나의 정서도, 삶의 방식도 여러모로 안정을 찾게 되었고, 그 안에서 비로소 행복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이러한 남편과 나의 관계가 자녀에게까지 확장된다는 면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에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열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일단 자녀 계획은 보류 상태이다. 지금은 커리어 기반을 다지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지금 커리어를 조금이라도 쌓아야, 나중에라도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머리로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갈수록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산모의 나이가 많아질수록 임신과 관련된 여러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형아 확률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늦은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내가 겪게 될 어려움은 현대 의학의 힘으로 어떻게든 되겠거니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확률이더라도 만약 아이가 유전적인 문제를 안고 태어난다면 그건 어떻게 해야 할지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운 일이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불편함을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니, 심지어 아이는 자신의 선택으로 이 세상에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노산으로 인해 기형아 확률이 늘어난다는 점은 쉽게 넘어가기 어려운 지점이었다.
커리어와 출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은 경험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출산과 커리어,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아쉬움은 남을 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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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저것도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은 로맨스 장르에서 자주 등장한다. 두 명의 남성이 동일한 여성에게 호감이 있는 삼각관계에서, 모두가 행복한 상황은 있을 수 없다. 드라마나 웹툰의 회차가 거듭되면서 시청자/독자들은 누가 여성의 선택을 받는 진정한 주인공인지 갑론을박을 펼친다. 자신의 주장을 어필하다가도 다른 주인공 후보의 매력에 빠져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독자와 작가의 치열한 눈치 싸움 끝에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지어진다. 만약 아무와도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건 최악인걸까 차악인걸까.
어떤 경우도 다른 경우보다 더 낫다고 하기 어려운 이런 상황을 물리학에서는 쩔쩔맴 상태(frustrated state)라고 부른다. 사전에서는 frustrated를 ‘충족되지 못한, 좌절된’ 정도로 풀이하지만, 일상적으로는 ‘짜증 나고 답답한’ 상황에 가깝다. 물리학적으로는 여러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해답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걸 택하자니 저게 안 되고, 저걸 택하자니 이것도 안 된다. 이것도 저것도 다 필요 없다고 책상을 뒤엎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어서 그저 쩔쩔매게 되는 상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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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그렇다고 책상을 뒤엎을 수도 없는 이런 상태를 물리학에서는 ‘쩔쩔맴 상태(frustrated state)’라고 한다. (출처: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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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일 보는 유리도 사실은 쩔쩔매다가 어정쩡한 상태로 굳어버린 물질이다. 보통 고체 상태에서는 물질을 이루는 원자나 분자들이 규칙적으로 정렬되는 결정구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유리의 내부는 다르다. 단단하고 형태를 유지하는 성질을 보면 유리는 분명 고체이지만, 내부 원자 배열은 액체처럼 무질서하다. 유리컵, 유리문, 스마트폰 유리 액정 등 유리가 우리 일상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듯이, 완벽한 해답에 도달하지 못한 채 그럴듯한 상태에 머물러버린 상황 역시 우리 삶 곳곳에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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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유리(오른쪽)와 석영(왼쪽)은 모두 이산화규소(SiO₂)로 이루어져 있지만, 구조는 전혀 다르다. 석영은 분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결정 구조를 이루는 반면, 유리는 무질서한 배열을 가진다. (출처: 사이언스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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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라는 말도 있을 만큼,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내리며 살아간다. 일상적으로는 탕수육을 부먹으로 먹을지, 찍먹으로 먹을지 정하는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어떤 사람과 함께할지와 같은 중대한 문제까지 우리의 삶은 선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문제의 무게가 커질수록 고려해야 할 조건은 많아지고, 조건이 많아질수록 모든 것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선택을 찾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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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에는 애초에 모든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여러 불완전한 상태 중 하나로 살아갈 뿐이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아쉬움은 남고, 다른 가능성에 대한 미련 역시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우리의 선택은 겉으로는 단단한 고체처럼 굳어지지만, 그 내부는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유리와 같다. 더 나은 선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지금의 선택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끌어안은 채 우리는 삶을 이어간다.
변리사 준비를 그만둔 것도, 박사를 포기한 것도 돌아보면 아쉬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스스로 상기하며 마음을 다독인다. 게다가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변리사 시험공부를 하면서는 물리학을 공부하며 전혀 접할 일이 없던 법체계를 접하고 법조문의 구조를 익힐 수 있었다. 박사는 그만두었지만, 대학원에서 보낸 5년의 세월 덕분에 내 자존심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데이터 분석이라는 커리어도 비영리 단체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선택할 수 있었다.
커리어와 출산이라는 문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커리어를 선택하면서 얻는 것도 있고, 출산을 미루며 감수해야 할 리스크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차피 완벽한 선택은 없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했느냐보다 그 선택 위에서 어떤 삶을 만들어가느냐일 것이다. 커리어를 택하든, 출산을 택하든, 혹은 그사이 어딘가에 머물게 되든, 우리는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유리처럼 조금씩 단단해져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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