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다. 연고도 없는 내가 부산에서 온 이직 제안에 가겠다고 대답한 것은, 다분히 새로운 삶, 모험을 좋아하는 습성 때문인데, 부산에서 보낸 15년을 돌이켜 보면, 그 모험은 큰 성공이었다고 하고 싶다. 특히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겠다는 것, 마음의 여유 갖고 살고 싶다는 목적을 위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몇 번의 답사 끝에, 아이들 학교가 많은 해운대에 자리를 터를 잡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운대 바닷가만 알았던 서울 촌놈이 부산을 내려가 배운 것 중 하나는, 해운대가 웬만한 도시 하나만큼이나 큰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 가족은 지금 독일에 살고 있는데, 해운대 구만으로도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네 배 정도 된다.
해운대에는 좌동, 중동, 우동이있다. 그냥 왼쪽, 가운데, 오른쪽이다. 공무원들의 무신경이라니. 부산에는 구포(거북이가 알을 낳는 표구)나 냉정(차가운 우물이 있던 자리), 몰운대 (구름이 사라지는 언덕) 같이 멋들어진 이름이 많은데 현대에 지어진 이름들은 한숨이 나온다. 옛 해운대 역 뒤편 길의 새로운 이름은 해리단 길이다. 경리단 길을 베낀 것이다. 한심한 노릇이다.
수영강 하구에 자리 잡은 해운대 우동에는 예전 공군 비행장 자리에 들어선 센텀시티와 광안대교를 건너 해운대를 진입할 때, 바다와 대비되는 은색 마천루들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마린시티가 있다. 반면 좌동은 2호선 끝 장산역을 중심으로 이뤄진, 방사형으로 계획된 단지로 학교와 아파트들이 모여있다. 비교하자면, 우동은 서울의 판교일대와 비슷하고, 좌동은 분당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 개발시기도, 좌동이 먼저 개발되고 나중에 우동이 개발되었다. 분당과 판교의 개발보다 한 박자 정도 느리게.
그 가운데 중동이 있다. 해운대 기차역과 해운대 해수욕장이 있는, 많은 서울 사람들이 '해운대' 하면 떠올리는 곳이다. 우리 가족이 막 도착했을 때는 센텀시티와 마린시티 개발이 끝나고 분양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부동산 업자들은 높이 솟은 신축 고층아파트들을 우리에게 권했지만,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건 서울에서 지겹도록 보지 않았는가? 나는 아직 옛 해운대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중동에 터를 잡기로 했다. 우리가 선택한 아파트는 애들 놀이터가 있는 큰 공원을 아파트 단지들이 빙 둘러싼 형국을 하고 있었다. 저기서 우리 아이들이 뛰어놀면 위에서 바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삶이 머물러 있는 듯한 중동 특유의 느낌이 좋았다. 당시에는 아직도 기와집들이 남아 있었고, 정원이 있는 이층집 양옥들과 우리 어렸을 때 동네 같은 좁은 골목길로 이뤄진 작은 집들이 몇 군데 들어선 아파트들과 조화를 이뤘다. '여긴 삶이 그대로 남아 있구나. 기능적으로 재조립된 삶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8 학군 한복판에서 장가가기 직전까지 살았다. 강남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거기서 오래 산 사람들은 정작 강남이라는 곳에 대한 별다른 느낌이 없다. 교통이 약간 편하다는 것뿐. 그래서 강남에 대해 좀 환상 같은 걸 갖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이질감을 느꼈는데, 가끔 어떤 지역과 지역 문화에서 그런 묘한 위화감을 느낄 때도 있다. 나는 오래된 해운대 중동은 그 위화감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건대, 내가 반겼던 그 느낌을, 누군가는 미완의 기회로 보았을 것이다.
그곳에 자리 잡은 이후, 내가 퇴근하면 아이들을 2인용 유모차에 태우고 바닷가로 나가 놀곤 했다. 아이들을 모래사장에서 놀게 하고 우리는 바닷가 맥주집에서 맥주를 한잔 하는 일상은 평생 서울에서 살아온 우리들에겐 호사였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만에 바닷가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첫째 아이는 갈매기들을 쫓아 넓은 바닷가를 뛰어다녔고 나는 둘째를 아내에게 맡기고 첫째를 쫓아 걷곤 했다. 우리 아이들은 부산이라는 고향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가 부산에 자리 잡았던 2008년경 해운대 바닷가에는 오래된 한국 콘도라는 건물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모래를 씻을 장비와 공간을 인심 좋게 오픈해서, 나는 이제 막 어린이집을 다니던 첫째,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둘째를 데리고 바닷가에서 놀다가 거기서 발을 씻기고 집에 들어가곤 했다. 어느 날 그게 해체되고 터를 닦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나중에 여러 명을 감옥에 보내고 공사 중에 여러 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 LCT 가 건축된 곳이다. 평화로운 부산에서의 삶 이면에 얼마나 많은 부정부패와 제어되지 않는 욕망이 몰아치고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은 그 빌딩이 올라가면서부터였다.
작가 소개 - 장난감 만들고 글쓰는 아저씨. 서울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지만, 세 아들을 부산에서 낳고 키웠습니다. 지금은 부산 거리에서 인연을 맺은 늙은 개, 그리고 가족과 함께 독일 바이에른에서 소박한 일상을 꾸리고 있습니다. 보드게임 ‘렉시오’, ‘스파이시’ 등을 세상에 내놓았고, 공저로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청년>,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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