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휘청이게 만드는 생각이 있다.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져보면 삶이 버거울 정도의 큰일은 아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와의 낯선 관계가 당황스러웠고 새로 맡은 프로젝트는 생각만큼 진척이 잘 되지 않았다. 요즘 부쩍 외로워하시는 부모님과 통화를 끝낸 직후였다. ‘사는 건 버겁구나, 앞으로 이렇게 계속 어려운 일만 가득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차올랐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자는 시간이 아깝다’고 말한 게 고작 며칠 전이었는데, ‘계속 잠이나 자고 싶다’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버겁다는 단어가 커다란 먹구름이 되어 마음을 내리덮는 듯 했다.
우리 머릿속은 큼지막한 양동이 같다. 쉴 새 없이 누군가가 물을 들이붓는다. 졸졸졸. 물을 채우는 소리가 끊기지 않고, 물이 찰 때마다 양동이는 출렁인다. 마음이라는 양동이에 끊임없이 채워지는 것은 ‘생각’이라는 물이다.
‘지금 평안한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순간은 24시간 중 몇 분 남짓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마음이 늘 출렁이는 이유는 마음이 끊임없이 말을 지어내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는 불가능해서 멍하게 있는 순간에도 머릿속은 여러 단어와 문장으로 빼곡히 채워진다. ‘오늘 점심 뭐 먹지’ ‘그 연예인이 누구였더라’, ‘내일은 따뜻하게 입어야지’ 와 같은 생각은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지만, 어떤 생각은 풍덩 소리와 함께 우리 마음이라는 양동이를 뒤흔든다. ‘그때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이번 면접에서 떨어지면 어쩌지’와 같은 마음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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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전념치료(ACT) 창시자 중 한 명인 켈리 윌슨(Kelly Wilson)은 인간의 마음을 ‘단어 기계(word machine)’라고 이름 붙였다. 끊임없이 생각을 만들어 내는 우리 마음을 단어를 생산하는 기계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속이 시끄럽다’는 우리 옛말도 이런 마음의 상태를 적절하게 나타낸 말이 아닐까.
마음은 그렇게 작동한다. 잠시도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고 단어로 가득한 자루를 들고 와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내가 한심하다’,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생각했을거야’, ‘내일 발표 망할 것 같아’와 같은 자루를 부지런히 던져놓는다. 이러한 말은 주로 과거나 미래,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로 데리고 간다.
흔히 생각은 한두 가지 사건만으로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한다’거나 ‘내 인생은 희망이 없다’고 확대 해석하며 현실을 왜곡해 버린다.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또한 실제로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발표가 망하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그런 단어나 생각만으로도 마치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믿어버리게 만든다. 상상만으로도 뇌는 경고 신호를 보내어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뛰고 몸이 경직된다.
유난히 휘청이게 만드는 생각이 있다. 내게 절실한 주제일수록 낚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내일 발표가 내게 중요할수록 ‘내일 발표 망하면 어쩌냐’는 문장이 적힌 자루 속으로 뛰어들고 만다. 사람들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을수록 ‘어제 그 말을 괜히 했다’는 자루를 본 순간 심장박동이 빨라질지 모른다.
쟁쟁거리는 경보음이다. ‘너한테는 이거 중요하잖아, 잘 지켰어야지’하고 마음이 보내는 경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고 싶어도 그게 안 된다. 나 역시 아이와의 관계, 새로운 프로젝트, 부모님을 돕는 일. 그 모든 것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기 때문에 ‘이걸 다 잘 해내지 못할 거야, 버겁다’는 생각이 더욱 크게 들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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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생각의 자루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있다. 그중 하나는 현재의 순간에 닻을 내리는 일이다. 지금 나는 어디에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가장 원초적인 내 몸의 감각에 집중해 본다. 심호흡도 유용하지만, 54321 기법도 간단해서 자주 쓰인다. 호흡을 고른 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 5가지, 몸이 닿는 곳이나 무언가를 만졌을 때 느껴지는 촉감 4가지, 가만히 주변에 귀 기울일 때 들리는 소리 3가지, 맡을 수 있는 냄새 2가지, 입에서 느껴지는 맛 1가지에 머물러 본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바디스캔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듯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이다. ‘단어 자루’가 내 주의를 빼앗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그 자루 속에 파묻혀버릴 때. 그래서 몸도 마음도 소진될 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른다. 먼저 머리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묵직하거나 저릿한지, 뜨겁거나 차가운지 살핀다.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도 괜찮다. 1, 2분간 있는 그대로 그 감각에 집중해 본 다음 목과 어깨를 살핀다. 어깨가 뻐근한지 목의 어느 부위가 당기거나 편안한지도 느껴본다. 평소에는 잘 몰랐다가 의식을 집중하면 괜스레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통증 또한 그대로 바라본다. 팔과 손, 가슴, 배와 등, 엉덩이와 허벅지, 다리와 발바닥, 발가락까지 차례차례 몸의 곳곳에서 어떤 감각이 느껴지는지 주의를 기울인다. 이런 방식으로 허공에 떠돌다 사라지는 단어들로 가득 찬 관념의 세계에서 지금 내가 뿌리내리고 있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느린 리듬으로 걷는 것도 도움이 된다. 거실을 휘휘 돌아다니거나 아예 밖으로 나와 조용한 골목을 걷는다.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면, "지금 ‘사는 건 버겁다’는 생각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라고, 라디오 방송의 멘트로 상상하는 방법도 있다. 그럴 때 몇 보 뒷걸음질 쳐서 ‘오늘도 이런저런 자루가 도착했구나’ 하고 멀찌감치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고통을 없앨 수는 없다. 우리 마음은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생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뼈아픈 후회, 아찔한 미래에 대한 상상, 자신의 인생이나 타인의 의도에 대한 비관적인 해석과 같은. 마음속 무수한 말소리가 마음을 출렁이게 하지만, 부단히 현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생각을 믿는 대신 지금 내가 느끼는 감각을 둘러싼 세계를 믿기로 선택해 본다. 그때 우리는 눈앞에 있는 소중한 것에 더 마음을 쏟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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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Kirk Strosahl, Patricia Robinson, Thomas Gustavsson (2017) 상담에서의 단기개입전략, 김창대, 남지은 역, 시그마프레스.
이미지 출처 Isto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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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지안
여전히 마음공부가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성격 좋다는 말에 가려진 것들>을 출간하였고,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하였습니다.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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