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 (Legend)
공연은 순간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오직 그 시간, 그 순간에만 느껴지는 감정은 유일무이하고 기억은 결국 소멸되기 때문이다. 캐스팅의 조합, 그날 배우의 감정선, 나의 상태, 연주자의 리듬, 관객 전체의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딱 맞아 떨어지는 날은 극히 드물다. 그런 완벽한 날을 뮤덕 용어로는 '레전', 그보다 더 심하게 좋은 날은 '대레전'이라고 칭한다.
2017년, 내가 처음 만났던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을 두번째 관람하던 날 나는 '대레전'을 맞았다. 공연장 가장 뒷자리 가장 끝자리의 열악한 의자에서도 나는 줄줄 울며 커튼콜에 물개박수를 치던 그 심장뜀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내가 지금껏 뮤덕으로 살고 있는 가장 큰 핵심기억이다.
혹시 그런 마음을 알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듯한 최고의 감정을 느낀 이후, 다시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보는게 오히려 두려운 마음. 대레전의 그 완벽한 감정선이 다시 보면 사그라들까봐 여기서 멈추고 싶은 그런 마음. 바로 그런 마음 때문에 나는 초연 이후 9년간 이 공연을 다시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작년에 이 작은 한국의 토종 창작 뮤지컬이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더니, 토니 어워즈 6관왕이라는 쾌거를 이루고, 2026년 10주년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초연 배우들이 일부 회차에서 특별공연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발표까지 떴다. 9년이 지났다. 강산이 변했고 나도 늙었다. 그런데 예전 그 무대, 그 스토리, 심지어 그 배우까지 그대로 돌아온다고 하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너무 행복해서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는 유명해진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티케팅은 이제 아이돌 콘서트 저리가라 하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정말 우여곡절 끝에, 유일한 하루, 나름 괜찮은 좌석 딱 한자리를 앉을 수 있게 되었다. 한달여를 설레임 속에 기다린 후 드디어 공연을 보러 올라가는 날이 왔다. 가끔 천재지변으로 결항이 될 때도 있기 때문에, 나는 제발 눈비바람이여 그 날만 피해다오를 외쳤고 다행히 공연장에 정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 이 공간에 초연 배우들이 기다리고 있다. 무려 내 본진도 있다. 10여년 전 제임스, 올리버, 클레어가 지금 이 공연장 건물 안에 같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 만으로도 이미 내 몸은 타임캡슐을 탄 듯 하늘을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았다.
관크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소극장 공연장의 로비는 보통 뮤덕들로 가득 차 굉장히 조용하다.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중학생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이 하나둘 시끌시끌하게 모이기 시작했다. 어라? 이들이 왜 지금 여기에 있지? 이상했다. 조금 있으니 학생 군단은 점점 많아졌다. 서로 때리고 장난치고 뛰어다니는 깨발랄한 학생들 사이에,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나타나더니 티켓을 배부해 주셨다. 이 비글 친구들은 심지어 포토존에서도 인간 피라미드를 만들기도 하고, 남남 커플 엽기사진 등 기상천외한 사진 배틀을 하며 즐기고 있었다. 포토존에서조차 배경사진만 조용히 찍어왔던 나를 포함한 뮤덕들은 이 군단들 사이에 희석되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 그날은 학생 단체관람이 있는 날이었다.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내가 얻어낸 소중한 레전극이 관크로 마무리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관크: 한자 ‘觀’과 ‘비판적인, 비난하는’ 등의 뜻을 가진 영단어 ‘critical’을 합쳐 만든 신조어로, 공연장이나 영화관 등 공공장소에서 다른 관객의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공연장 안으로 입장하니 또한번의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쥐죽은 듯 조용해야 할 객석이 쉬는 시간의 교실 같이 와글와글 했다. 뮤덕들 사이에 끼어 앉아 마음 속으로 공연을 상상하며 설레이던 그 공연 직전의 공기를 이 곳에는 느낄 수 없었다. 덕생 최대의 위기였다.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정말 컸다.오늘의 공연은 배우 3명과 현악기, 피아노 만으로 이루어지는 아날로그틱한 공연이어서 더더욱 이 소음이 걱정되었다. 공연 3분전이었다. 내 뒤에 앉은 아저씨들은 미국 금리와 국제 정세를 논하며 열띈 경제 토론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과연 3분 후에 정말 공연이 시작하기는 맞는 건지 아득해졌다.
드디어 공연 직전이 되었다. 공연장 직원이 맨 앞에서 유의사항을 육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엄청난 교실 소음같은 시끄러운 노이즈가 어셔 한명의 말로 파도처럼 조용해졌다. 마치 수업종이 울리고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교실같았다. 나는 놀라웠고 약간 긴장하는 듯한 앞자리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니 슬쩍 웃음도 나왔다.
연주자들이 입장한 후에 각자의 자리에 앉고 악기를 들고 시작을 준비했다. 이제 정말 객석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너무 놀라웠고 너무 감사했다. 제발 이 분위기 그대로 끝까지 가주세요. 무대는 암전이 되었고, 내 심장은 미친듯이 쿵쾅거렸다. 나는 암전 상태에서 항상 기도를 한다. '신이시여. 제가 지금 이 순간에 살아있고, 이 공간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대레전
공연이 시작되었다. 세상에, 그 옛날 제임스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옛날 올리버와 클레어 그대로였다. 나는 1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것 같았다. 스토리를 이미 다 알아서였을까. 뮤지컬 넘버를 그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였을까. 나는 이들이 이 공간에 현재 있는 것 만으로 그냥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 극은 미래의 어느 시절 낡아서 버려진 헬퍼봇(요즘으로 따지면 피지컬 AI)인 '올리버'와 '클레어' 가 그들의 옛주인인 사람 '제임스'를 찾아서 떠나는 스토리다. 올리버는 주인이 항상 '고맙다 올리버'라고 말하는 그 순간을 기억하며 행복해 한다. 주인은 사라졌지만, 한결같이 기다리는 로봇, 나는 그게 내 옛강아지를 떠올리게 해서 처음부터 울컥했다.
극은 묻는다. 사람의 마음은 변한다. 사랑도 변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불구덩이에 또 뛰어드는가. 올리버와 클레어는 인간의 감정을 배워보려 한다. 처음으로 사랑을 시도해본다. 찬란한 여름같은 사랑이 사라지고 원망과 절망의 감정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 어려운 사랑을 찾는다. 왜 그럴까? 그냥 상처받지 말고, 지금의 로봇처럼 감정 없이 하루 하루를 아주 편안하고 루틴하게 살면 되는데, 왜 서로를 찾을까? 사랑의 시작과 끝을 그려보는 작가의 메세지는 참 정교해서 볼 때마다 다르게 읽힌다. 그리고 AI가 마구 양산되는 지금의 혼란스러운 시점과도 신기하게 맞물린다.
놀랍게도 관크는 없었다. 공연의 시작부터 객석은 쥐죽은 듯 조용했고, 순간 순간 터지는 유머에 관객은 더 크게 웃고 호응해줬다. 뮤덕보다 더 솔직하게 웃고 박수쳐주니 분위기는 오히려 더 좋았다. 나는 첫번째 넘버부터 내 옛날 강아지가 소환되서 울기 시작하다가, 마지막 즈음에는 클레어의 감정선에 이입되어서, 변해가는 사랑, 낡아가는 몸, 외로워지는 사랑을 함께 느끼며 정말 많이 울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인 제임스가 피아노치는 그 장면은 정말 음율이 전해지는 공기 하나까지 너무 완벽했고, 세명의 배우 모두 날라다녔다. 덕분에 나는 정말 감사하게도 단체관람석 한복판에서조차 또 대레전을 맞았다.
공연이 끝나고, 학생들을 포함한 객석 모두는 벌떡 일어나서 물개박수를 쳤다. 나가는 길에서 학생들은 그제야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너 울었냐?" "내가 왜 우냐?" "아니, 그러니깐 기억이 어떻게 된거라고?" 등등 그 시절 특유의 센척과 비속어가 이제는 귀엽게만 들렸다. 이렇게 얌전히 집중해준 멋쟁이들이었다.
올리버와 클레어가 제주로 온다.
현재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서울 공연을 마치고 전국 16개 지역에서 지방 공연을 진행 중이다. 소극장 뮤지컬이 지방에 내려오는 경우는 사실 희박하다. 그런데 극이 유명해진 덕분에, 무려 올해 6월, 이 문화 볼모지인 '제주도'에도 공연이 내려온다다.
극중에서 서울의 버려진 헬퍼봇들이 사는 아파트에만 살던 올리버와 클레어는 주인 제임스를 만나기 위해서 '제주도'를 떠나는 일탈을 벌인다. 클레어는 제주에만 서식한다는 6월의 반딧불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몹시 행복해한다. 그런데, 실제로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시절인 6월에 제주도에 이 공연이 내려오다니, 올리버와 클레어가 정말 제주로 내려오다니, 뮤덕은 과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살다 볼 일이다. 시골 뮤덕이 혜화로 날아가지 않고, 모든 배우들이 제주로 내려오는 이런 날도 있다. 왠지 그 날은 나를 위해서 이 모든 팀이 내려온다고 착각을 한번 제대로 해보며, 또 그날의 레전을 기대해본다. 곧 발표될 캐스팅과 티케팅 일정을 기대하는 것 만으로도 나는 누워서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공연 발표부터 죽음의 티케팅, 막공까지의 대 여정을 함께 품고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부지런한 덕후들이여. 곧 봅시다. 이번에는 제가 제주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작가명 - 김아람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20년 차 말(horse) 수의사입니다. 말수의사의 덕력 가득한 뮤지컬 관극기. 덕후가 현생과 밀당하며 살아가는 비법을 적고 있습니다. https://brunch.co.kr/@aidia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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