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편이 이기며 끝나는 이야기의 기록 01
토건족들과 싸워 이긴 학부모들의 이야기 정희권
부모가 되면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을 하게 된다. 너무 연약하고 소중해서 어찌할지 몰라하면서 작고 귀여운 아이를 안는 것으로 시작해서, 똥기저귀를 갈아주고, 잠들지 않는 아이를 업고 계속 동네를 돌아다니는 일, 친구와 싸운 아이를 화해시키는 일, 그리고 아이가 겪는 위험이나 부당한 일에 맞서는 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되고 나 또한 도움을 주게 된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실감이 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아이를 위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전혀 예상도 못한 일을 하게 되기도 한다.
2018년, 나는 아내 몰래 내차에 일본도를 싣고 다녔다. 그럴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학부모의 이름으로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지역의 토건족들과 2년 반을 맞섰다. 그리고 다행히 승리했다. 이 이야기는 2016년에서 2018년까지 일어난 긴 싸움의 기록이다.
부산의 한 대학에서 제의를 받고 연고도 없는 부산의 대학으로 거처를 옮긴 건 막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2010년이었다. 처음에는 두 아들의 아빠였고, 부산에 와서는 세 아들의 아빠가 되었다.
나는 부산이 좋았다. 나처럼 서울이 고향인 사람은 냉정히 말하면 서울이 고향이 아니라 그냥 고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울은 애틋한 고향이 되기에는 너무 커다랗고 너무 빨리 변화한다.
삶은 예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계획이 필요 없는 건 아닌데, 내 생각에 계획은 그 계획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법이다. 부산에 살 계획도 없었지만, 그전에 장가갈 계획도 없었고, 아들을 가질 계획도 없었다. 아니, 아들에 대한 소망이 하나 있긴 했는데, 총각 때 나는 아들에게 다스베이더 가면을 쓰고 "I am your father" 이 드립을 한번 쳐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세 명씩이나 생길 줄은 몰랐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이, 알고 보면 멋진 것일 때가 많다. 얼떨결에 하게 된 (안 그랬으면 못했을 거다) 결혼이 그랬고, 세 아이의 아빠가 되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었다. 첫째는 계획을 하고 만들었고, 둘째는 잠시 방심한 사이에 생겼으며, 셋째는 그럴 리가 없는데 생겼지만 지금 보니 셋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 싶다.
그리고 부산에서의 삶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너무 멋졌다. 첫 아이를 데리고 부산에 살면 괜찮을지 확인하러 내려왔을 때, 해운대 바닷가에 도착한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큰 아이는 갈매기와 함께 30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바닷가를 뛰어다녔다. 나는 이곳에서 아이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아이들에게 부산이라는 고향을 선물하고 싶었다.
2년 만에 부산에 오게 된 이유였던 대학을 그만뒀지만 우리 가족은 부산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부산도, 부산 사람들도 좋았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그 회사가 서울로 이전한 이후에는 부산에서 창업을 했다. 어느 날 애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운영위원을 뽑는다고 연락이 왔다. 아내와 이야기한 후 자원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처음 해운대에 자리를 잡았을 때 이웃으로부터 들었던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한 학부모가 담임에게 200만 원을 송금한다는 게 2000만 원을 송금했는데, 이건 너무한 것 같아서 망설이다가 잔액을 돌려달라고 했더니 "6년 치 한 번에 입금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건이었다.
그때는 김영란법이 없었다. 당시 해운대 지역은 교육열이 높고 치맛바람이 센 지역이라 촌지와 차별대우가 만연하다고 했다. 나는 소위 명문이라고 하는 대학의 부속 초등학교를 나왔고, 한참 8학군의 위세가 높을 때 그곳 한복판의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 당시의 촌지문화와 차별대우는 지금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런 나쁜 문화에는 큰 역설이 있다. 더 좋은 교육을 바라는 마음으로 한 일들이 정작 교육을 망치고 있었다. 우리 모두에겐 교육도 돈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결부되는 순간 교육은 망가진다.
운영위원회라는 것은 냉정히 말하자면 심의,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고 학교의 행정은 모두 그 학교 행정의 수장인 교장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운영위원회는 학교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일들에 대해 학부모들의 접근이 가능한 좋은 통로다. 그 정보를 갖고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나는 말하자면 불순한 목적을 갖고 운영위원회에 가입했고, 얼마 되지 않아 운영위원장이 됐다. 만일 악질 교사의 사례가 발견이 되면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면을 체험하도록 안내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경험을 해보니 걱정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모두 헌신적이었고, 그때 아이들은 올바른 교육철학을 가진 교장선생님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당시 해운대 초등학교에는 인근에 고층빌딩이 없어 항상 따뜻한 햇빛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학교 분위기도 그랬다. 정기적으로 학교에 가서 예산을 평가하고, 아이들의 행사계획, 방과 후 프로그램 운영안을 검토하는 등 여러 일을 했다. 학부모들은 돌아가면서 아이들 통학로의 교통봉사를 했는데, 우리는 아이가 셋이라 그 일을 수시로 하게 됐다. 곧 그 학교 아이들을 대부분 다 알게 됐다. 아이들은 귀여웠고, 별 사건 사고 없이 아이들은 학교를 다녔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그때 해운대 일대는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2009년 이명박 정권 때 복마전으로 유명한 해운대 해변가 고층빌딩 LCT 프로젝트에 온갖 특혜가 주어졌다. 온갖 비리로 얼룩진 그 건물이 건설되고 있었고, 이어서 마치 옛날 오락실앞 두더지 잡기 게임의 두더지들 처럼 유사한 마천루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이후에야 그런 건축허가들의 이면에 시민들의 편의나 안전을 위한 대비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알게 됐다. 그 불똥이 학교 바로 앞에 까지 번졌다. 초등학교 정문 앞은 인도와 차도의 구분도 잘 되지 않는 2차선 도로였다. 그 도로를 진입로로 하고, 심지어 정문에서 3,4 미터 떨어진 곳에 지하주차장의 출입문이 생기는 36층 건물 3동으로 이뤄진 아파트 단지를 세운다는 정신 나간 건축계획을 누군가 부산시에 제출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너무 말이 안 되는 계획이라 통과될 리 없다고 말들을 했다. 그러나 그때는 토건불패로 불리던 시대.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이 통과돼 버린 것이다.
나는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앞으로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보게 될지는 그때 짐작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인생이란게 미리 안다고 꼭 더 잘 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코너 소개 - LCT 특혜 사건 이후 해운대에 초고층 건물들이 난립하던 때, 학교 정문 앞 3미터 거리의 고층 건물 건립에 맞서 800일 동안 토건 세력과 싸워 이긴 평범한 학부모들의 기록을 남겨보려 합니다.
*글쓴이 - 정희권 - 장난감 만들고 글쓰는 아저씨. 서울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지만, 세 아들을 부산에서 낳고 키웠습니다. 지금은 부산 거리에서 인연을 맺은 늙은 개, 그리고 가족과 함께 독일 바이에른에서 소박한 일상을 꾸리고 있습니다. 보드게임 ‘렉시오’, ‘스파이시’ 등을 세상에 내놓았고, 공저로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청년>,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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