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라는 이름으로 공간을 책임져온 지 이제 곧 3년이다. 무언가가 완성되기엔 짧지만 그 일에 익숙해지기엔 충분히 긴 시간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5년 뒤, 혹은 10년 뒤를 상상하다 보면 결국 질문은 다시 오늘로 돌아온다. 내가 지금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3년을 넘어 10년 뒤에도 지속 가능한 문화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그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자 지난 2월 초 독립서점의 메카라 불리는 제주로 향했다. 답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제주의 서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독을 견디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지막한 돌담 너머 숨어 있는 서가들은 누군가의 취향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세계였다. 그곳들은 단순히 책을 파는 상점이 아니라, 각자의 우주를 지탱하는 서점지기들의 고요한 투쟁이자 가장 아름다운 발언대처럼 보였다. 나는 그 풍경 속을 거닐며 공간이 품을 수 있는 고유한 공기에 대해, 그리고 그 공기가 방문객의 내면에 어떤 무늬를 남기는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다.
취향이 켜켜이 쌓인 세계, 서가가 지도가 되는 순간들
2014년에 문을 연 제주 1호 독립서점 ‘소심한 책방’은 ‘안 망하고 12년!’이라는 비장하면서도 다정한 안내문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내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STAFF PICK’이라는 글귀로 가득 찬 서가였다. 책방지기가 깨알 같은 손글씨로 적어 내려간 쪽지들에는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부터 마음을 흔든 구절, 그리고 왜 이 책을 권하는지에 대한 사연이 한 통의 편지처럼 담겨 있었다.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단순히 책을 쇼핑하는 것이 아니라, 서점지기가 정성껏 적어 놓은 마음의 기록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한국 유일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의 서점 150’에 선정된 ‘책방 소리소문’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소리 소문 없이 좋은 책이 퍼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그 이름처럼, 이곳은 방문자의 상황과 결에 맞는 책을 발견하게 하는 힘이 탁월했다. 서가 곳곳에 붙어있는 책방지기가 엄선한 문장들은 서가를 거닐다 잠시 멈춰 서게 만들며 발걸음을 자연스레 늦추게 했다. 책 한 권을 방문객들이 함께 필사하며 완성해 나가거나, 직접 녹음한 시 낭송을 들으며 한 편의 시를 눈으로 읽고 귀로 듣는 공감각적 경험은 책을 읽는 행위를 하나의 신비로운 의식으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단순한 소매점을 넘어, 가치를 제안하는 사유의 거점으로
우리가 서점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책을 구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곳에서만 가능한 ‘우연한 마주침’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소심한 책방’의 메모 앞에서 걸음을 멈췄던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서점이 누군가의 내면과 또 다른 누군가의 호기심이 만나는 정거장 같은 곳임을 다시금 떠올렸다. 책방지기가 공들여 적은 문장은 보이지 않는 실이 되어 낯선 여행자의 마음을 낚아채고, ‘소리소문’에서 들려오는 시 낭송의 떨림은 각기 다른 삶을 살던 이들을 하나의 주파수로 연결한다. 이 보이지 않는 연결이야말로 공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자, 온라인의 알고리즘으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독립서점만의 유일무이한 경험이다. 결국 브랜드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렇듯 사소하고 다정한 연결의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새롭게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책을 파는 기술’이 아니라 ‘가치를 제안하는 태도’였다. 앞으로의 서점은 단순히 책이라는 상품을 진열하는 소매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운영자의 철학이 응축된 하나의 브랜드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공유하는 ‘사유의 거점’이 되어야 한다. 책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 책을 고른 사람의 맥락과 그 공간만이 뿜어내는 고유한 공기는 오직 그곳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큐레이션이란 단순히 책을 분류하는 작업이 아니라, 서점지기가 통과해온 삶의 궤적을 서가라는 지도를 통해 독자에게 건네는 내밀한 고백이어야 함을 나는 그 작은 종이 조각들 사이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이를 위해 서점은 단순히 흘려보내는 동선이 아니라, 끊임없이 손님에게 ‘말을 거는’ 공간이 되어야 함이 분명했다.
제주에서 가져온 이 작은 변화의 씨앗들이 우리 공간에서 어떤 꽃을 피우게 될까. 3개월 뒤, 5월의 햇살 아래서 맞이할 크레타의 세 번째 생일은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선명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나는 ‘더 좋은 서점’이 되는 비법을 찾기보다, ‘조금 더 나다운 서점’으로 남을 용기를 내어보려 한다. 남들과 비슷한 성공의 궤적을 쫓기보다, 우리만이 줄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경험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일. 정답을 찾지 못했기에 오히려 자유로워진 이 마음이 다시 서점의 불을 켰을 때 손님들에게도 다정한 힌트가 되어 전해지기를 바란다. 힌트는 정답보다 힘이 세다. 그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 사유와 자유의 시간
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과 사람이 만나 펼쳐지는 소소하지만 진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 글쓴이 - 강동훈
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인이 꿈이자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