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바지를 입고 결혼할 날을 꿈꾸며
물리의 시선, 노다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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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나만의 개성을 살린 색다른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특히 웨딩드레스가 아닌 바지 정장을 입고 결혼하고 싶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치마 대신 바지 교복을 입고 다닌 나였다.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신부 대기실에 앉아 하객들을 기다리기보다는, 바지를 입고 로비를 자유롭게 누비며 하객들과 인사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비즈가 가득 박힌 세상 화려하고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식을 위해서는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우선 신랑·신부와 양가 부모님이 결혼식 당일에 입을 옷을 챙겨야 했고, 결혼식 당일 이용할 메이크업과 헤어샵을 예약해야 했다. 하객들에게 돌릴 청첩장을 미리 만들고, 또 청첩장에 들어갈 웨딩사진 촬영도 진행해야 했다. 지나고 나니 별것 없어 보이지만, 결혼식 준비를 시작할 때는 뭐가 이리도 챙길 것도 많고 옵션도 많은지 정신이 없었다. 그냥 다 알아서 해주면 좋으련만 최종 결정은 모두 우리 부부, 아니 결국에는 나의 몫이었다.
이런 결정의 홍수에 떠밀리다 보니, 나의 개성을 찾는 일은 어느새 내 머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많은 사람이 선택하는 옵션은 내가 굳이 발품을 팔지 않아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서비스는 묶어서 할인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만약 드레스를 입지 않고 바지 정장을 입고 싶다면, 알맞은 업체를 내가 직접 찾아 나서야 했다. 거기에 묶음 할인 혜택은 받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대세를 따르는 편이 나의 시간과 돈과 노고를 아끼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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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결혼식에서 남편과 손을 맞잡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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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원래 그런 것은 없다. 수풀에 난 길은 처음부터 풀과 나무가 그곳만 피해서 자라나기 때문에 길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어느 한 사람이 수풀을 헤집어가며 길을 내었고, 뒤이어 여러 사람이 그 길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게 된 것이다. 대세는 결국 여러 사람의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 번 만들어진 흐름은 후손들에게 으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압박을 주게 된다. 마치 자연계의 법칙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보통 에너지가 낮아지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유는 산꼭대기가 산 아래보다 위치에너지가 더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이 영원히 산이고 바다도 영원히 바다인 것은 아니다. 지진이나 화산 폭발 같은 지각 변동이 일어나면, 산과 바다가 뒤바뀌기도 한다. 히말라야같이 높은 산은 이런 지각 변동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한때 산꼭대기였던 곳이 바닷물 아래로 잠기기도 하고, 바다 화석이 산꼭대기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형이 바뀌더라도,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자연 법칙은 여전히 성립한다.
질량이 있는 모든 물체는 서로 잡아당긴다는 만유인력이라는 법칙도 있다. 덕분에 지구와 태양은 서로 잡아당기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영원할 것만 같은 태양도 빛을 잃게 된다. 그 때가 되면 지구에 살던 생명은 진작에 멸종했을 테고, 어쩌면 만유인력에 따라 지구가 태양의 일부로 삼켜질 가능성도 있다. 이렇듯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 있을 것 같은 자연계도 점차 그 모습을 달리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의 관습도 변할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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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결혼식은 여느 결혼식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양가 어머니는 한복을, 아버지는 양복을, 신랑·신부는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었다. 신랑은 로비에서, 신부는 신부대기실에서 하객들을 맞이했다. 예식은 양가 어머니의 화촉점화로 시작해서, 신랑·신부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복식이나 형식이나 남들과 비슷한 결혼식이었지만, 디테일에서는 나의 개성을 살리려 노력했다.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신랑·신부의 소개였다. 우리는 중학교 시절부터 인연이 이어졌지만, 상대편 하객으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일 테다. 하객들은 아니 어쩌면 부모조차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어쩌다가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할 수도 있었다. 결혼식이 우리만의 예식이 아니라 하객들도 함께하는 행사이기를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남편이 하객들에게 서로를 소개하는 코너를 넣었다.
혼인 서약문도 재미있게 꾸렸다. 내가 “남편이 먹고 싶은 음식은 뭐든 만들어 주겠습니다.”라고 하면, 남편은 “독이 들어있더라도 먹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가 직접 축가를 불렀다. 나는 이소라의 청혼을 불렀는데, 보사노바의 살랑거리는 느낌과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남편은 DAY6의 Welcome to the Show를 골랐는데, 인생을 무대(Show)에 비유해서 함께 맞이할 앞날을 다짐하는 가사가 인상적이었다.
결혼식에는 많은 분들이 귀중한 주말에 시간을 내어 참여하는 만큼, 하객들도 즐거운 시간이기를 바랐다. 덕분에 형식적인 순서가 아닌 하객들이 모두 웃고 즐기는 결혼식이었다는 후기가 남았다. 나이 50을 바라보는 이전 직장 동료는 당신이 결혼할 시절에는 이런 결혼식은 꿈도 못 꿨다고 전했다. 당시만 해도 결혼식은 시쳇말로 ‘엄근진’이라 부르는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분위기였기에, 아쉬우면서도 즐거운 분위기의 우리 결혼식이 부럽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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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결혼식에서 남편을 바라보며 축가를 부르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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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모습은 달라질 수 있다. 산과 바다, 더 나아가 태양계 까지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자연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결혼식의 모습은 변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변하지 않는 듯 하다. 바로 결혼식은 두 사람의 새로운 시작을 친인척을 비롯한 주변 지인들 앞에서 선포하고, 또 두 사람의 인연을 축하하는 자리라는 점이다. 부부라는 관계가 두 사람의 약속을 넘어 사회적인 의미로 확장되는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객들이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전해준 말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남았다. 결혼 당사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가 함께한 시간이 된 것 같아 기획자로서 무척 뿌듯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바지 정장을 입지는 못했어도, 결혼식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실현한 셈이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20년 정도 지나서 리마인드 웨딩을 한다면 바지를 입고 싶다는 로망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안 비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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