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책방지기의 삶을 상상해본다. 책 향기 가득한 공간의 문을 열고 좋아하는 책을 발견하며 웃는 손님을 맞이하고 자신이 아끼는 책을 소개하며 어색한 침묵을 책으로 여는 순간을 떠올린다. 크레타의 ‘일일책방지기’는 그런 동경의 장면을 단 하루지만 실제로 살아보는 경험을 제공한다.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하루 다섯 시간을 서점에 머물며 손님을 만나고 책을 소개하고 직접 판매까지 할 수 있다.
이 제도에는 흔히 말하는 알바비가 없다. 하루 다섯 시간을 내어주지만 우리가 제공하는 것은 책 선물 한 권과 소소한 다과와 음료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정도가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이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끊이지 않는다. 작년 5월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크레타의 일일책방지기로 이 공간을 다녀갔다.
수능을 마친 예비 대학생도 있고 방학을 맞은 대학생도 있다. 휴가를 나온 군인도 있고 갭이어를 보내고 있는 직장인도 있다. 부산을 여행하다 우연히 들른 사람도 있고 책방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은퇴 후 다양한 곳에서 봉사하며 삶을 살아가는 70대도 있다. 혼자가 아니라 소중한 친구와 함께 뜻깊은 하루를 보내고 싶어 찾아온 이들도 있다.
나이도 직업도 살아온 시간도 모두 다르다. 그럼에도 이들이 크레타에 남기고 가는 하루에는 묘하게 비슷한 결이 있다. 책을 좋아하는 마음이 잠시나마 책을 지키는 역할로 바뀌는 순간의 진지함이 있다. 특별한 여행을 떠난 것도 아니고 기념사진을 남길 만한 이벤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밖에서 바라본 책방지기의 하루는 낭만에 가깝지만, 그 자리에 서 있는 하루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생각보다 많은 망설임으로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책방지기 했던 하루’를 오래 기억에 남는 경험으로 이야기한다.
애서가의 동경의 공간 ‘서점’
이 제도는 처음부터 기획된 프로그램은 아니다. 작년 5월은 결혼 10주년이었고 가족과 함께 일주일간 여행을 다녀오기로 한 시기였다. 혼자 운영하는 서점이기에 문을 잠시 닫고 다녀올 계획이었다. 그때 서점을 자주 찾던 한 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커피를 파는 것도 아니고 책만 파는 곳이니 카드 결제하는 방법만 알려주면 하루 이틀 정도는 문을 열어도 될 것 같다는 말이었다.
순간 나의 영업장을 타인에게 맡긴다는 것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스쳤다. 하지만 곧 서점에서 훔쳐 갈 것이 있다면 기껏해야 책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내어주겠다는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일주일 동안 서점을 맡아줄 일일책방지기를 공개 모집해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네다섯 명만 지원해도 많이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 스물여덟 명이 지원했다. 그 숫자를 보며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책방에 대한 좋은 기억과 추억 그리고 동경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가족과 함께 정말 마음 편히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지원해준 모든 분들에게 책방지기의 경험을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행 이후에도 각자의 일정에 맞춰 하루씩 안내하다 보니 이 일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프로그램이 되었고 지금은 크레타를 대표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낯선 사람에게 온전히 맡기는 하루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하루다. 그럼에도 자신이 책방지기로 서 있는 동안 만날 손님을 위해 자기 돈을 들여 초콜릿과 사탕, 엽서와 책갈피를 준비해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사실 나는 책방지기에 지원한다면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시간에 더해 무엇인가를 더 나누고자 한다.
자기가 크레타를 지켜주는 그 시간만큼 이 서점에 누가 되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있고 어떻게든 한 권이라도 더 팔아 서점의 하루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자신이 서점을 지키는 동안 방문한 손님이 조금이라도 특별한 경험을 하고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그 마음들이 겹치고 쌓이며 이 하루를 만든다.
일 년이 지나고 나니 두 번, 세 번씩 일일책방지기로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서점에서 보낸 하루가 그 사람에게 꽤 특별한 시간이었나 보다. 굳이 다시 오지 않아도 되는 자리인데도 시간을 내어 다시 문을 열겠다고 말해주는 마음이 고맙다. 한 분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유년기에 경험했던,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누렸던 순수한 즐거움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책의 자리에서 사람의 자리로
일일책방지기로 참여하면 ‘일일책방지기 노트’를 쓰게 되어 있다. 일종의 하루 기록이다. 나는 그 사람이 보낸 시간을 직접 볼 수 없으니 그 노트에 적힌 문장들로 하루를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그 안에는 늘 비슷한 마음들이 적혀 있다. 한 권이라도 더 팔지 못한 아쉬움이 있고 손님에게 말을 한 번 더 걸어볼까 말까 망설였던 순간이 있고 자기 가게가 아님에도 괜히 느껴졌다는 걱정과 불안이 있다. 그 감정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조금 놀란다. 일일책방지기일 뿐인데 정작 내가 이 서점에서 매일 느끼는 감정을 이분들도 그대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이 제도를 더 조심스럽게 대하게 만든다.
어쩌면 일일책방지기 제도는 누군가에게 특별한 하루를 선물하는 프로그램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시간 덕분에 나 또한 특별한 하루를 선물 받는다. 외부 강의를 통해 크레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공간을 소개하기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근교로 나가 주중에 제대로 하지 못한 아빠 노릇을 하기도 한다. 누군가 크레타의 하루를 맡아 서점을 열고 닫는 동안, 나는 이 공간을 혼자서만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서점은 여전히 내가 운영하는 공간이지만, 더 이상 나 혼자의 공간은 아니라는 감각을 배우고 있다.
어느덧 크레타는 4년 차 서점으로 접어든다. 처음에는 서점이란 ‘책을 사고 파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동안 이 안을 채워온 것은 책의 오고감이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맺어온 관계의 드나듬이었다. 책의 자리에서 사람의 자리로, 서점은 시간과 함께 그렇게 방향을 바꾸며 성장하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 사유와 자유의 시간
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과 사람이 만나 펼쳐지는 소소하지만 진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 글쓴이 - 강동훈
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인이 꿈이자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