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출산을 하게 되어서요
육아와 자아 사이 _ 노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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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와 프리랜서 사이
가나에서의 국제기구 근무를 마친 후, 나는 일을 좀 쉴 계획이었다. 열악한 조직 구조에서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리느라 더는 남아 있는 체력도, 의욕도, 열정도 없던 터였다. 아마도 말로만 듣던 번아웃이 온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나의 꿈이었던 직업이었기에 타격이 더 컸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딱 1년 정도 회복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느슨하게 지내는 날들이 석 달 남짓 이어졌을 무렵, 처음 기대와 달리 벌써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일과 공부를 중심으로 삶을 꾸리고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방법만이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나였다. 잠시간 ‘무용할지라도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아보겠노라 호기롭게 백수 생활을 시작했는데, 뚜렷한 성취 목표가 없는 나날들에서 큰 재미나 동기를 찾지 못했다. 찾는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무료함, 공허함, 그리고 조바심에 매몰되어가는 나를 마주하다보니 하루하루 시간을 때우는 느낌으로 살게 되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결국 나는 슬슬 일할 거리를 찾아 눈을 돌렸다. 하지만 아직 본격적이고 싶지는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몸담은 국제개발협력 분야는 프로젝트 단위 업무가 많아서, 중단기로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다. 불안정하다고 볼 수 있는 고용 환경이 되레 느슨하게 일하고 싶은 나에게는 좋은 상황이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단기 해외 출장이나 교육연수 업무를 진행할 기회를 하나둘씩 얻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한 달에 열흘 남짓 일하는, 백수와 프리랜서 사이 어디쯤에서 애매하고 실험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오랜만에 다시 일하는 즐거움, 해외로 나가서 낯선 문화를 만나는 설렘, 새로운 일을 익히며 성장해 나가는 내 모습이 좋았다. 잠이 부족하고 쫓기듯 일해도 그 자체가 내 존재 가치를 발견하는 듯한 희열이어서 힘든 줄 몰랐다. 마침내 다시 살아난 기분마저 들었다. 첫 출장을 시작으로 점차 다른 국가로의 출장이 이어지고, 프로젝트에서 만난 동료들이 다음 프로젝트에 나를 찾아주거나 다른 좋은 기회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업무 영역을 조금씩 확장하면서 나는 1년간 다채로운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앞으로 한두 해 정도는 더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다방면으로 배우고 익혀보자 다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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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두려움 사이
내가 프리랜서로 하던 일은 주로 1년을 주기로 돌아가는 일이어서, 이제 첫해에 뿌린 씨앗을 부지런히 거둬들이며 새 한 해를 시작할 때였다. 전년도에 열심히 즐기며 내 일처럼 임했던 덕분인지, 감사하게도 함께 일했던 분들로부터 다시 같이 일하자는 전화를 종종 받았다. 하지만 나는 작년 이맘때 계획과는 조금 다른 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제가 곧 출산을 하게 되어서요...”
그렇다. 결혼 10년 만에 아가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고령 산모라는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번아웃 이후 더 이상 ‘더 열심히, 더 완벽하게’라는 주문으로 스스로를 들볶지 않게 된 마음가짐 덕분이었을까. 그동안은 짝꿍과 둘이서 순간순간을 재미있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셋이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즈음 때맞춰 소중한 생명이 찾아온 것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열이면 열 모두 반가워하며 축하 인사를 건네주었다. 그 말끝에 함께 일하지 못해 아쉽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참 고맙고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렇게 첫 번째 전화를 끊었을 때까지만 해도 태어날 아가와 나의 새 삶을 축하받은 기분이 참 좋았다. 하지만 비슷한 패턴이 두 번, 세 번 반복되자 문득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두 해 쉬고 나서도 과연 이렇게 나를 찾아줄까. 이대로 잊히지는 않을까. 나 이제 다시 일할 수 있을까. 자유롭고 느슨해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일하는 형태 그 이면에 있던 불안정성을 마침내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왜 내가 여태까지 공부와 일을 핑계로 아이를 갖겠다는 생각도, 갖지 않겠다는 생각도 유보해 왔었는지를 새삼 되새기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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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 사이
임신한 내 삶에 있어 아가를 만난다는 기대감과 설렘이 가장 절대적 중심축임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앞으로 나라는 존재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이 꽤 자주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특히 ‘일하는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될 것인지, 그간 들어온 온갖 경력 단절 괴담이 떠오를 때마다 심란해진다.
물론 나로 인해 이 세상에 오게 된 아가를 좋은 사람으로 키워내는 일이 향후 몇 년간의 지상 최대 과제일 것이고, 나는 그 책임과 기쁨을 후회 없이 누리고 싶다. 이 새로운 역할이 지금 내 바람이자 이상이라면, 일하는 나와 내 경력을 지속하는 일은 그 반대편에 자리한 현실 영역의 고민이다. 새내기 프리랜서에게 겨우 1년 남짓의 흐릿한 경험 이후에 이어지는 1년 혹은 그 이상의 공백기는 더 뿌옇고 짙은 두려움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프리랜서의 삶도 이제 겨우 맛봤을 뿐인데 육아의 세계는 더더욱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라서, 나의 두 자아가 어떻게 타협할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 불확실성이 주는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일단은 ‘일하는 나’가 주인공이었던 현실을 외면한 채 ‘아가를 건강하게 잘 만나 기쁘게 키우는 나’라는 이상에 집중하며 육아서적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이상마저 곧 현실이 될 날이 가까워져 올수록 외면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상으로서의 약효가 다 떨어져 가는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는 어쩌면 아가를 잘 키우겠다는 이상 그 너머 더 크고 새로운 이상을 세울 때가 되었나 싶다. 아가의 탄생으로 인해 더욱 단단해지고 깊고 넓어져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의 내 자아가 태어날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 말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늘 꿈꾸고 절망하고 타협하며 나아가는 것이 우리 삶이라면, 겪어보지 않은 엄마로서의 삶도 엎치락뒤치락하다 결국에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 믿어보는 거다. 이 과정에서 한 인간으로서도, 사회적이고 일적인 존재로서도 성장할 동력을 얻는 나, 그 새로운 이상 혹은 소망을 붙들고 살아보는 거다.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훨씬 낫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프리랜서 1년 차의 삶을 이렇게 무기한 마감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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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아와 자아 사이
일 중심의 삶에 임신-출산-육아의 세계가 찾아오면서, 그 사이 어디쯤에서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가는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 글쓴이 - 노현정
교육 x 국제개발협력 언저리에서 일하고 여행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다정한 우리를 꿈꾸며 글을 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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