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햇살이 긴 창문을 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설거지를 모두 마치고 차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전기 주전자의 스위치를 눌렀다. 물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며 창밖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식탁 의자를 끌어와 창문 앞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쏟아지는 오후 햇살에 눈이 부셨지만, 나는 그냥 눈을 감고 햇살의 감촉을 느끼고 싶었다. 내 얼굴 위로 쏟아지는 그 빛은 마치 나의 얼굴을 지긋이 감싸는 느낌이 들만큼 무게감이 느껴졌다.
“엄마 뭐 해?”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던 아이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엄마, 지금 광합성 중이야.”
“어? 엄마가 무슨 식물이야? 광합성을 하게? 히히”
“히히. 응. 엄마는 지금 햇볕을 쬐고 있어.”
.........😊...........(약간의 침묵이 지난 뒤)
“하긴 맞아, 엄마는 꽃🌻이니까.”
“하하하^^ 고마워.”
아이는 자주 내게 햇살만큼 따뜻한 칭찬을 해 준다.그것도 어색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한국어로. 아일랜드에서 결혼을 하고 또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우리 부부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아이에게 한국어로만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을 남편에게 말했고, 그는 흔쾌히 찬성을 했다. 이후 아이가 태어나고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보내는 아이의 마더 랭귀지는 한국어가 되었고, 남편이 퇴근한 뒤에는 아빠의 언어인 영어가 가정의 언어가 되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나는 아이와 소통할 때는 꼭 한국어를 사용했다.
그러다 아이가 두 돌 정도 지나자 나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면서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를 남편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편은 우리가 한국어로 나누는 대화를 아주 재미있게 바라보며 불편함을 내색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아이와 한국어로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우유가 이렇게 기분 좋은 단어일 줄이야!
그 덕분에 아일랜드에 살면서도 아이에게는 한국어가 제1의 언어가 되었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가르치고, 간단한 단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일부러 커다란 화이트보드를 사서 몇 개의 글자들을 써 놓고 아이가 오가며 볼 수 있게 해 두었다. 또 한글 카드를 자석으로 붙여 놓기도 하고, 그 단어들을 일부러 사용해서 아이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가 한글을 익혀가며 익숙해질 수 있기를 바랐다.
어느 날, 아이가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 안방으로 가서 침대 정리를 하고 다시 아이에게 돌아갔는데, 아이가 마치 무엇인가 보여줄 것이 있다는 표정으로 환하게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그림이라도 그린 건가.’ 생각을 하며 화이트보드로 시선을 옮겼는데, 그곳에는 아이가 기분이 좋아서 팔짝 뛰며 달리는 모습을 똑 닮은 단어 하나가 써져 있었다.‘우유’.아이가 스스로 처음 쓴 글자였다. 나는 그 두 글자 ‘우유’를 보고 덩달아 폴짝 뛰며 “정말 잘 썼다. ‘우유’가 정말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네.”라고 아이에게 칭찬을 하고 또 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우리는 ‘우유! 우유! 하면서 온 집안을 뛰어 다녔다.🤣
아이가 쓴 한글 '우유'_춤추며 달리는 두 사람 같다_개인소장
엄마 눈 밥이 있는 것 같아?😲
엄마가 꽃이라는 아이의 따뜻한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채로 한참 햇볕을 쬐며 광합성을 하다가 뭔가 이물감이 느껴져 눈을 한참 비비기 시작했다. 아이는 책을 읽다가 다시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눈이 간지러워? 눈 밥이 있는 것 같아?”
나는 ‘눈 밥’이라는 표현에 따가운 눈을 비비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 밥이 아니고, 눈곱이라고 하는 거야.”
“엄마가 어제 내 귀를 보고 ‘귓밥 있는지 한번 보자’라고 했잖아. 눈에 귓밥 같은 노란 게 있으면 그건 눈 밥 아니야?”
“눈은 눈곱이라고 해야지. 어제는 코딱지를 코지라고 하더니만. 하하하.”
“그건 엄마. 엄마가 나한테 ‘손가락 귀에 넣고 귀지 파지 마라.’라고 했으니까. 비슷하게 더러운 게 코에서 나오니까 그렇게 생각한 거야.”
“OO야,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그래도 사람들끼리 이렇게 쓰기로 약속한 거니까, 눈밥 아니고 눈곱, 코지 아니고, 코딱지 라고 하는 거야.?”
“응. 엄마 (....) 참 복잡하단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아이를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지평선을 향해 조금씩 미끄러지며 열기를 식혀가는 오후의 태양과 그 하늘이 만들어내는 아일랜드의 노랗고 붉은 노을빛을 배경으로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의 발그레한 얼굴이 정원 한 편에 핀 동백꽃 마냥 참으로 예뻤다.
가끔 갑자기 찾아오는 향수병은 나에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만, 다행히도 아이와 한국어로 나누는 이런 사소한 대화들 덕분에 그리 오래 머물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그리고 아이와 나누는 한국어야 말로 내가 아일랜드에서 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와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어 주는 아이가 진심으로 고맙다.
* 아일랜드 일상 다반사
국제결혼을 한 뒤 아이를 키우며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에 살면서 겪고 있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 글쓴이 - 도윤
사람을 돕기 위해 공부하고 또 일하며 살다가, 이제는 아일랜드에서 아내이자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나를 알고 너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내가 쓰는 글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읽고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