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코끼리를 나누며, 연말을 건너는 법_ 사이에 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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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의 상태 표시창에 ‘오프라인’인 사람이 늘어간다. 동료에게 메일을 보내면 OOO(Out of Office) 자동응답이 돌아온다. 연말 휴가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올해는 미국 연방 정부도 크리스마스 즈음인 12월 24일과 26일에 특별 휴가를 준다고 한다. 주말까지 합치면 약 닷새간의 휴가가 생기는 셈이다. 내가 일하는 기관은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새해 다음 날인 1월 2일까지 전사 휴무다. 국제기구 특성상 본국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는 직원들이 많기 때문이다. 연차 휴가를 붙여 조금 더 긴 휴가를 즐기는 직원들도 적지 않다. 사실상 12월 초부터 중순까지는 비교적 긴 휴가를 염두에 두고 한 해의 사업을 마무리하느라 모두가 바쁘게 달리게 된다.
여름 휴가를 거의 쓰지 않는 대신 다른 직원들보다 조금 이른 12월 초부터 겨울 휴가를 보내던 우리 가족은, 올해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기로 했다. 덕분에 예년에는 함께하지 못했던 연말 행사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휴가철에 들어가기 전, 부서 송년회도 그중 하나였다. 한국의 직장에서처럼 “오늘 저녁 송년회나 할까?”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이었다. 바쁜 12월에, 굳이 이 시점에? 하는 볼멘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왕 하기로 한 거라면, 어떻게든 이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보고 싶어 아이디어를 짜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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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코끼리 선물 교환을 앞두고 식탁에 둘러앉은 송년회 풍경
(실제 사진을 ChatGPT로 변환한 일러스트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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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 단골 아이템으로는 한국의 마니또 게임과 비슷한 시크릿 산타(Secret Santa)나 크리스마스 테마의 우스꽝스러운 티셔츠를 뽑는 어글리 티셔츠(Ugly T-shirt) 콘테스트 같은 것들이 있다. 올해 우리 부서 송년회에서는 하얀 코끼리 선물 교환(White Elephant gift exchange)을 해보면 어떨까 제안했고, 부서장은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다며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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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코끼리 선물 교환(White Elephant gift exchange)의 기본적인 룰은 다음과 같다.
- 참가자는 잘 포장된 선물을 하나씩 준비한다.
- 사회자가 지목한 첫 번째 사람이 선물을 고른 뒤 포장을 열어본다.
- 다음 사람은 이미 공개된 선물을 뺏거나(steal), 아직 개봉되지 않은 선물을 고를(pick) 수 있다.
- 자신의 선물을 빼앗긴 사람은 새로운 선물을 고를 수 있지만, 자신이 빼앗긴 선물을 다시 찾아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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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교환식에 ‘하얀 코끼리’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예전 왕조 시대에 다른 나라와 선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유지비가 많이 들고 거추장스러우며 쓸모없는 선물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하얀 코끼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 활동의 포인트는 소소한 재미를 위해 ‘과연 선물이라고 해도 괜찮을까’ 싶은 물건을 뜯으며 파생되는 즐거움에 있다.
부서 송년회로 이 행사를 처음 시도하는 만큼, ‘예쁜 쓰레기’를 주고받기보다는 그래도 집에 가져가 기분 좋을 만한 무언가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와 선물 교환식이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한 공지 메일을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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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오래 살아온 동료들도 있지만, 최근 1~2년 사이 새로 우리 기관에 입사한 동료들도 많아 하얀 코끼리 선물 교환이 처음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송년회 날, 사무실을 오가며 “어떤 선물 준비했니?”라는 스몰 토크가 오가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설렜다. 주말에는 선물 교환식을 핑계 삼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간만에 쇼핑을 즐겼다. 내가 고른 선물은 핫초콜릿 세트였다. 집에 있는 코코아를 타 마셔도 좋지만, 연말 기분을 낼 수 있는 눈사람이 그려진 핫초콜릿과 마시멜로가 잘 포장된 선물 꾸러미를 다시 한 번 포장지에 곱게 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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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는 약 서른 개의 선물이 쌓였다.
첫 번째로 공개된 선물은 포근한 머플러였다. 처음에는 다들 수줍어했다. 어떻게 남의 선물을 가져갈 수 있느냐며 점잖은 체를 하며 계속 새 선물을 고르던 동료들은, 향신료 세트, 머그컵 세트, 디퓨저, 여행용 베개 등 탐나는 물건들이 등장하자 주위를 둘러보며 선물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내 뺏고 뺏기는 선물을 둘러싼 눈치 싸움이 벌어졌다.
재미없게 그냥 새 선물을 고를 거냐며 “뺏어! 뺏으라고!(Steal! Steal!)”를 외치며 분위기가 살짝 과열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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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들은 몇 번이고 주인을 바꾸며 테이블 위를 돌았다.
사무실이 춥다며 다른 동료에게서 머플러를 가져갔던 동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동료에게 그 머플러를 다시 빼앗기고 못내 아쉬워했다.
누군가는 자신이 고른 디퓨저를 빼앗길까 봐 묻지도 않았는데, ‘아직 맡아보지도 않은 향’이 본인의 찰떡 취향이라며 선제 방어에 돌입했다. “그 향이 무슨 향인데?”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말을 고르는 얼굴을 보며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즉석에서 아무 말을 늘어놓으며 지켜보려던 그 디퓨저는 결국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연말 분위기에 어울리는 진저브레드 하우스 키트도 여러 개 나왔는데, “그래서 이거 어떻게 만드는 건데?”라며 난감해하는 동료에게 우리는 “유튜브를 검색해 봐!”라고 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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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의 소소한 재미를 더하기 위해 3D 프린터로 루돌프 모양의 머리띠를 몇 개 출력해 가져갔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훨씬 좋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머리띠를 써보고, 거울을 보며 웃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느라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특히 늘 양복 차림에 근엄한 우리 부서장이 성화에 못 이겨 루돌프 머리띠를 쓰고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보며, 갑자기 마련된 이 송년회가 결국 우리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건네는 자리로 기억될 것 같아 뿌듯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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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머리띠를 쓴 부서장. 연말은 때때로, 직급을 잠시 내려놓게 만든다.
(실제 사진을 ChatGPT로 변환한 일러스트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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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행사가 그렇지 않은가.
조금 귀찮고 번거롭지만, 끝내는 작은 기억으로 서로에게 남는 순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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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개의 선물이 모두 포장지를 벗었고, 결국 모두가 선물을 하나씩 챙겼다. 송년회는 금세 일상의 대화로 흘러갔다. 평소에는 시간을 정해 약속을 잡고 업무에 필요한 이야기만 나누던 동료들이 연말 계획을 이야기하고, 언제 어디를 다녀왔는지 경험을 나누는 즐거운 수다가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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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앉았던 테이블에는 한국에서 3년간 살았다는 필리핀 출신 동료가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한국 여행을 묻자 속리산 근처의 산장을 거쳐 1박 2일로 다녀온 등산과 내려와 먹었던 산채비빔밥을 떠올렸다. 그 이야기를 듣자 나도 필리핀의 산간 지역 여행이 생각났다. 2년간 필리핀에 머무르며 여러 바다를 다 가봤지만, 세부나 보라카이, 팔라완보다도 계단식 논이 펼쳐진 사가다 지역에 갔던 기억이 더 오래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나라에서 잠시 잊고 지냈던 풍경을 떠올리며 웃었다. 다른 동료들은 다음에 한국이나 필리핀에 가게 되면 우리가 이야기한 그 지역들을 꼭 가보고 싶다며 말을 보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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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코끼리는 원래 달갑지 않은, 어쩌면 부담스러운 선물의 상징이었지만, 그날만큼은 한 해의 끝자락에서 서로를 잠시 웃게 만드는 윤활유 같은 역할을 했다.
“올해도 수고했다”는 말을 대신해, 작은 선물에 마음을 담아 건네는 방식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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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얼결에 MC가 된 나는 스포트라이트가 부담스러워 동료 한 명을 공동 MC로 급히 섭외했다. 주최 측의 농간이라는 이야기가 나올까 봐 MC 두 명은 가장 마지막에 선물을 고르기로 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선물은 딱 하나만 남아 있었다. 새 선물을 열어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까부터 눈에 들어왔던 귀여운 스누피 모양의 휴대폰 충전기 세트를 동료에게서 뺏어왔다. 휴대폰과 물아일체가 되어 있는 우리 집 중학생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밤늦게 돌아와 아이에게 선물을 건네자 “응”, “아니” 같은 단답만 하던 녀석이 “예쁘네”라는 말을 하며 곧장 책상을 치우고 충전기를 설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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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은 이런 사소한 장면들 속에서 스며든다.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있으면 마음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들. 선물 하나, 웃음 한 번, 그리고 서로를 향한 안부 인사 같은 것들로.
회사와 휴가 사이에서, 업무와 연말 사이에서 일은 끝나지 않았고 휴가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 어딘가에서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시간을 기획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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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년회도 누군가의 한마디로 끝이 난다. 부서장은 송년회를 마무리하며 직원 모두가 “well deserved”한 연휴를 보내면 좋겠다고, 일과 분리된 시간을 즐기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알고 있다. 부재중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서로 ‘미안하지만’으로 시작되는 이메일을 주고받게 되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부를 마음 한켠에 담아두고, 잠시라도 숨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란다. 자리를 정리하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단체 사진을 찍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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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끝에서, 같은 자리에 잠시 모였던 사람들, 단체사진.
(실제 사진을 ChatGPT로 변환한 일러스트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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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은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쉽지 않은' 한 해였다.
포장을 벗은 하얀 코끼리를 건네듯, 거창하지 않은 마음으로, “잘 버텼다”고 서로를 가볍게 격려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얼마 남지 않은 올해,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오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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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서서] 황진영 미국 Washington DC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우리’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공저 <세상의 모든 청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퇴사하면 큰일 날 줄 알았지> 를 썼습니다.
양 극단으로 보이는 개념들은 어쩌면 서로 맞닿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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