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티를 받던 중 트레이너가 웃으며 말했다. “남자 회원님들은 배 좀 나와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하시는데, 확실히 운동은 여자 회원님들이 더 기를 쓰고 하세요.” 피티도 여자들이 훨씬 많이 받는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여자는 예뻐야 하잖아요. 그래서 기를 쓰는 거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 말은 정확하지 않다. 여성에게 외모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존재하는 건 분명하다. 나 역시 그 기준 안에서 오래 살았다. 예뻐야 한다는 말을 믿었고, 그 기준에 맞추지 못할 때 스스로를 검열했다. 그 압박에서 처음부터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외모를 가꾸는 일을 사회적 압박에 대한 반응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나라는 존재의 감각을 유지하는 일에 더 가깝다.
한 번은 친구들과 얘기하다 빵 터진 일이 있다. 모르는 사람이 자기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게 너무 짜증난다는 얘기였다. "내가 왜 너네 어머니야? 썩을." 아이랑 같이 있던 상황도 아니었다고 한다. '어머니'보다는 '저기요'가 훨씬 낫다. '아줌마'는 거의 싸우자는 얘기다.
중년 여성이 되면, 이제는 내려놓으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욕망을 줄이고, 여성성을 포기하고, 무게 있는 태도를 갖추라는 요구. 여자가 아니라 ‘아줌마’로 존재하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그 요구에 대해 나는 속으로 초딩들처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싫은데- 내가 왜- 얼마 줄 건데-"
나는 여전히 욕망 덩어리고, 생기 넘치고 활력 있는 몸을 원한다. 이건 젊음을 되찾겠다는 의지도, 세월과 겨루겠다는 승부욕도 아니다. 그저 지금의 나로서 가능한 한 멀리까지 나를 데려가고 싶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차피 질 싸움이라고. 사람은 늙고, 몸은 변하고, 결국엔 받아들여야 한다고. 맞다. 누구나 세월을 이길 수는 없다. 흰머리는 더 늘 것이고, 주름은 깊어질 것이다. 운동을 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리 무너질 필요 있나?
나에게는 아직 만들고 싶은 얼굴과 몸이 남아 있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움에 끌린다. 나는 한껏 버둥거린다. 세월에 처맞아도, 나 자신을 최대한 멀리 지키기 위해서. 당분간은 뭐, 이러고 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