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블랙
당신의 블랙은 어떤 색인가요?
쇼핑 좀 해본 사람은 알 거다. 블랙 프라이데이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혹시 쇼핑과 안 친한 분들을 위해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는 “어머! 이건 사야 해!”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오는 최고의 쇼핑 시즌이다.
‘Friday가 금요일인데 왜 쇼핑하는 날이 아니라 쇼핑 시즌이야?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타당한 의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블랙 프라이데이는 시즌이 아니라 추수감사절 바로 다음 날인 11월 넷째 주 금요일, 단 하루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나 명절 전후로 기꺼이 지갑을 여는 소비자의 심리를 유통업계가 그렇게 쉽게 놓아줄 리 없다. 블랙 프라이데이가 가까워지면 유통업체들은 갖은 전략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훔치려고 애쓴다. 한 마디로 추수감사절 연휴를 기점으로 쇼핑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원래 단 한 번의 금요일을 뜻했던 블랙 프라이데이가 이런 과정을 거쳐 블랙 프라이데이 시즌으로 진화한 것이다.
흑자를 맛보는 날, 기쁨의 블랙
명실상부한 미국 최대의 명절인 추수감사절 바로 뒷날에 왜 블랙이라는 단어가 붙었을까? ‘블랙’과 신나는 쇼핑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명은 이렇다.
가족과 함께 추수감사절을 즐긴 미국인들이 바로 다음 날인 금요일에 두툼한 지갑을 들고 쇼핑을 하러 나섰다. 갑작스럽게 넘쳐나는 손님들 덕에 오랫동안 ‘in the red’ 상태에 놓여 있었던, 즉 적자에 허덕이던 가게 주인들은 ‘in the black’, 즉 흑자로 돌아서는 환희를 맛보게 되었다.
적자를 흑자로 돌리는 마법 같은 날이라는 의미에서 추수감사절 다음날인 금요일, 즉 프라이데이에 ‘블랙’이라는 단어가 더해졌다. 이제 미국의 소매업계는 블랙 프라이데이에서부터 크리스마스까지 이어지는 겨울 쇼핑 시즌에 다양한 물건을 싼값에 팔아 재고를 처리하고 매출도 올린다.
경찰들의 암울한 마음, 우울의 블랙
그러나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낸 것은 소매업계가 아니었다. 소매업계보다 앞서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사람들은 필라델피아 경찰이었다.
1950~1960년대, 필라델피아 경찰들은 11월 넷째 주 금요일마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 매년 11월 넷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 풋볼 경기를 보기 위해 추수감사절이 끝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필라델피아로 몰려들었고, 엄청난 인파에 쇼핑객까지 뒤섞여 교통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남들은 호젓하게 연휴를 즐길 때 휴가를 내지도 못한 채 초과근무에 시달리던 필라델피아 경찰에게 추수감사절 바로 다음 날인 금요일은 암울한 날이었다. 매년 반복되는 광란의 금요일에 지쳐버린 필라델피아 경찰. 그들이 사용한 ‘블랙’에는 암울하고 우울한 마음이 담겨 있다 .
경찰들의 번뇌와 고통을 의미하는 블랙에 매출 상승의 염원을 더해 '블랙'을 밝은 세상으로 이끌어낸 것이 바로 유통업계였던 셈이다.
금값이 폭락한 날, 암흑의 블랙
연일 고공행진 중인 금값. (물론, 최근 상당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그동안의 상승 폭을 생각하면 금값이 내렸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 금값이 폭락한 날도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불린다.
1869년, 금융업자 제이 굴드(Jay Gould)와 철도 사업가 제임스 피스크(James Fisk)는 금 시장을 독점해 금값을 끌어올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무려 400만 달러어치의 금을 시장에 풀어버리자 이들의 계략은 수포가 되었다. 정부의 대응은 두 사기꾼의 금 시장 독점 시도를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가 뒤따랐다. 뒤이어 금값이 급락하고 주식 시장도 폭락해 미국 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미국 경제가 빛 한 줄기 없는 나락 속으로 떨어진 날, 그날을 묘사하는 암흑이 ‘블랙 프라이데이’의 진짜 출발점이었다.
전 세계의 블랙 프라이데이
블랙 프라이데이는 이제 미국에 국한된 문화가 아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 전후로 쇼핑 대축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같은 중동 국가에 진출한 유통업체들은 현지인들의 종교적인 거부감을 고려해 블랙 프라이데이를 화이트 프라이데이로 변경해 비슷한 시기에 쇼핑 대축제를 연다. 한국 쇼핑몰들 역시 실제 블랙 프라이데이가 되기 한참 전부터 ‘얼리 블랙 프라이데이’ 같은 광고 문구를 앞세워 쇼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캐나다의 블랙 프라이데이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에 추수감사절을 기념하는 미국과 달리, 캐나다의 추수감사절은 10월 둘째 주 월요일이다. 미국보다 한 달 이상 이른 셈이다. 미국보다 북쪽에 위치한 탓에 수확 시기가 빨라 추수감사절도 그만큼 빨라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캐나다의 유통업계 역시 미국의 추수감사절에 맞춰 블랙 프라이데이 행사를 진행한다. 블랙 프라이데이 자체가 미국에서 시작된 문화인 탓이다.
맨 처음 미국 유통업계가 블랙 프라이데이 행사를 진행하며 매출 증가를 기록하기 시작했을 무렵, 캐나다 유통업계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남의 나라 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쇼핑 원정을 떠나는 캐나다인이 늘어나자 캐나다 유통업계의 생각도 바뀌었다. 이제 캐나다의 온·오프라인 소매업체들도 블랙 프라이데이 시즌이 되면 소비자들을 유혹하기에 여념이 없다.
블랙의 진화
블랙은 암흑에서 암울로, 다시 흑자로 진화했다. 블랙은 원래 하나가 아니다. 고정돼 있지도 않다.
검은색 먹으로 화선지에 그린 옅은 블랙
검은색 물감으로 그린 농도 짙은 블랙
빛의 99.65%를 흡수하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검은 반타 블랙
그리고 무려 빛의 99.995%를 흡수하는 ‘세상에서 가장 검은 블랙(blackest black)’
블랙의 스펙트럼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다. 광활하다.
“black이 뭐야?”라는 질문에 반드시 “검은색”이라고 답해야 하는 건 아니다. 블랙은 얼마든지 다른 의미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언어의 세계다.
(자매품으로, 사이버 먼데이(Cyber Monday)가 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파는 사람들의 번뜩이는 재치는 언제나 사는 사람들보다 한발 앞서 있다. 유통업계는 목요일에 시작해 일요일까지 이어지는 추수감사절 연휴로 만족하지 않는다. ‘어차피 온라인 상거래가 판치는 세상인데, 사람들이 출근하는 월요일에는 온라인 판매에 집중하자!’라는 의도에서 생겨난 게 바로 사이버 먼데이다. 언제, 어떻게 지갑을 열지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하는 현명한 소비자가 되자!)
[번역가의 슬기로운 언어 생활] 번역가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언어, 그 너머의 문화와 사람 이야기.
글쓴이: 김현정
읽고 쓰는 삶을 좋아하는 번역가입니다. 주로 경제경영 서적을 번역하고, 가끔 제 글도 씁니다. 취미는 책 사들이기입니다. 한강 작가가 어딘가에 적어둔 ‘읽은 책보다 읽을 책이 많은 책장’이라는 글귀를 가장 좋아합니다. 오늘도 책을 향한 저의 짝사랑을 불태우며 당당하게 책을 주문합니다. 이상은 높고 실천은 덜 하는 편이지만, 두루 책이라도 읽어두면 언젠가는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브런치에서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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