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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다. 어렵게 구한 토종 볍씨로 농사를 지었으니, 그 맛도 특출날 거라고 내심 기대했나 보다. 마을 논에 보리벼, 붉은차나락, 다다조, 새청무를 심었는데 그중 보리벼를 먼저 조금 도정해서 맛을 보았다. 보리벼는 토종벼 특징인 수염같이 생긴 긴 까락(벼 이삭의 껍질)이 분홍빛을 내고, 키가 큰 조중생종벼*이다. 그저 보기에도 아름다운 벼라 그 맛이 어떨까 정말 궁금했다.
오늘날 자급을 위한 소량의 양을 도정해 주는 정미소가 없어서, 논 지기 중 한 분이 직접 도정을 해왔다. 일단 쌀알이 몹시 작았다. 이래가지고 밥이 되겠나 싶었다. 씻어도 씻어도 희멀건 쌀 물이 계속해서 나왔다. 그래도 된장국도 끓이고, 김치도 꺼냈다. 밥 익는 냄새도 구수하고 얼른 한 숟갈 떠먹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부엌 창밖으로 보이는 초록색 산도 어느새 가을 옷으로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 이제 김이 펄펄 나는 갓 지은 따끈한 밥을 그릇에 담고 먹기 시작했다. 에계, 이게 무슨 맛이람?
맛이 없었다. 이럴 수가, 이래도 되나? 손으로 힘들게 지었는데 맛이 특출나지 않아서 실망하고 말았다. 내가 감기가 다 낫지 않아서 입맛이 사라졌나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절대 미각이 아니라서 내가 뭘 모르는 걸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평소에 먹던 밥맛에 비해 혀 위에 탱탱하게 굴러다니는 쌀알이 미묘하게 달랐다. 뭔가 바로 맛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이래서야 원, 주변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의기소침해져서 먼 산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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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맛을 기대했던 것일까. 예전에 귀도라는 토종쌀을 먹어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찰기가 넘치고 향긋하고 맛있어서 아이들이 두세 그릇을 연달아 먹었다. 그렇게 윤기가 흐르고 단맛이 줄줄 나서 몇 공기나 비울 수 있는 그런 맛을 상상했나?
어느새 우리는 감각적인 입맛에 길들여졌나 보다. 즉각적인 감각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무언가를 먹고도 ‘맛있다’, ‘맛없다’라는 말만으로 뭉뚱그렸던 것은 아닐까. 그 한 마디로 다 담을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을 텐데. ‘맛있다’, ‘맛없다’ 말고도, 여러 가지 다양하게 느끼는 점들이 있었을 텐데. 한 마디로 정리하는 순간 흘러 나갔을 작고 세밀하지만 중요한 것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커피만 봐도 그 맛의 세계가 몹시 다양하다. ‘맛있다’라는 말 안에 다양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커피에 관심이 있다면 자신이 마시고 있는 커피가 어느 지역에서 생산됐고, 원두 품종은 무엇인지, 로스팅은 어떻게 했는지, 누가 어떻게 무엇으로 내렸는지에 따라 맛이 다르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그렇게 원두의 다양한 맛을 즐기고, 그 미묘한 차이와 풍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취향도 다양해졌다고 본다. 반면, 매일 먹는 쌀 밥은 어떨까. 알게 모르게 획일화된 맛에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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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벼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없어지기도 했고, 이후 70년대 국가가 쌀을 관리해 오면서 통일벼가 전체 생산량의 80%나 차지 한 적도 있었다. 다양성이 사라진 것이다! 저마다 맛이 다르고, 찰기와 식감도 다 다양한 400개나 넘는 토종벼 품종들이 존재했다고 하는데, 오늘날 일반 농산물 시장에서는 잘 찾기가 어렵다. 예전에는 논이 그저 황금빛으로만 물드는 게 아니라 지역마다 자라는 벼가 달라서 오방색*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토종벼는 야생벼라고 보면 된다. 야생벼 습성을 가지고 있어서 화학비료가 넘치는 비옥한 땅에서는 잘 자라기가 어렵다. 그래서 토종벼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자연농법으로 재배해야 한다. 토종벼는 질소비료가 오히려 안 좋다는 점에서 오늘 날 기후위기 문제와 맞물려 가치가 있는 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손으로 애를 써서 길러왔지 않나. 세상에 내가 지은 쌀이 이렇게나 귀한 것이었다니 새삼 놀랍다. 결과물을 두고 스스로 탐탁치 않았던 나를 돌아본다. 즉각적으로 나오는 반응에 연연해 하는 나를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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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쌀은 거친 맛이 난다. 야생의 맛이라고 해도 좋겠다. 예를 들면 통밀빵, 호밀빵, 샤워도우와 같은 거친 빵이 더 건강에 좋다고 한다. 우리는 거친 것과 익숙하지 않다. 현미보다 먹기 더 편하고 부드러운 백미를 흔히들 맛있다고 말한다. 때론 거칠고 불편한 것이 몸에 더 좋다. 우리는 즉각적인 맛, 즉각적인 보상, 즉각적인 반응에 익숙해져 있다. 때론 어떤 일을 열심 해 놓고도 그 결과가 바로 주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런데 남다른 시간을 들이며 공들인 일은 어디 가지 않는다고 믿는다. 스스로에게 지금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선뜻 말해주면 좋겠다. 그러니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이 야생의 맛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올해 봄, 밀양에서 토종벼 농사를 짓는 농부께 처음 볍씨를 전해 받을 때가 생각난다. 보리벼는 키가 커서 요즘같이 들쑥날쑥한 날씨에 다 쓰러지고 수확하기 어려울 거라고 걱정했는데, 우리는 무사히 수확을 마쳤다. 빌린 볍씨를 다시 돌려줄 수 있게 된 거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마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만큼의 수확량이 나온 거다. 뭣 모르고 지은 첫해 벼농사가 돌아보니 풍년이었다.
*조중생종벼 : 출수(이삭패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중간 정도인 벼 품종을 의미합니다. 주로 남부지방의 2기작(봄-가을) 재배에 적합하다.
*오방색 :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 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가운데는 황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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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윤경
논과 밭, 산과 바다를 어슬렁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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