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지?_우연한 하루_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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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네 시간만 들어갈 수 있는 용머리 해안에 도착했다. 하늘엔 회색 구름과 햇살이 엉킨 채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주 출장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전, 시간이 남아 동료와 짧은 관광을 하는 중이었다. 일년에 두달 남짓, 하루에 몇 시간만 허락되는 곳이었지만, 마침 입구는 열려 있었다. 하지만 내리는 비는 멈출 것 같지 않았고, 주어진 시간은 두시간 남짓 뿐이었다. 우산도 없었다. 평소 축축한걸 싫어하는데, 한시간 정도 트래킹을 해야 한다니, 평소의 나였다면 이미 행선지를 바꿨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비 맞고 가보죠. 뭐 어때요?” 머뭇거리던 내 표정을 읽은걸까,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 동료의 한마디가 돌아가고픈 마음을 움직였다. 사실 동료는 나처럼 가벼운 패딩 점퍼가 아니라, 젖으면 더 무거워지는 코트를 입고 있었다. 괜히 투덜대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그냥 가 보기로 했다.
입구를 향해 오분 정도 걸었을까, 작은 고개 너머 커다란 무지개가 떴다. 학창시절 과학 시간 이후로 진짜 무지개를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무지개를 보니 나도 모르게 그곳에 멈춰 버렸다. 사진을 찍으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기억 서랍을 뒤적이다 떠올랐다. 바로 아빠와 함께 걸었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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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찍은 사진. 사진을 보고 쌍무지개 였다는 걸 알았다.
아빠는 여행을 유난히 좋아했다. 인터넷, 휴대폰도 없던 시절 우리 가족은 커다란 종이 지도를 들고 주말마다 여행을 떠났다. 모든 계획은 아빠의 머릿속에 있었고, 나는 어느 도시에 다다랐는지 알았을 뿐 뒷좌석에서 쿨쿨 잠을 자곤 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 즈음 “얘들아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리면 정확한 위치도 모른 채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빠는 여행지만 가면 가이드가 되었다. 조금 더 보태면 교수님 같기도 했다. 역사부터 환경, 기후까지, 여행지에 대한 설명을 줄줄 이어갔다. 우리는 아빠 뒤만 졸졸 따라 다니며 그 말을 한귀로 듣고 흘려 보내곤 했지만, 설명을 들으며 여행을 한 덕분에 머무른 장소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풍경 만큼은 사진처럼 저장될 때가 많았다.
용머리 해안도 그랬다. 가물가물 했지만, 산방산 바로 앞을 지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길을 걸어가니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그리고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저기 해안에 가 볼래?” 이십대의 제주에서, 아빠는 내게 물었다. 그날도 하늘은 회색빛 이었고, 나는 카페에 앉아 쉬고 싶었지만 아빠의 설레는 목소리를 외면할 순 없었다.
좁은 입구를 지나 울퉁불퉁한 해안으로 들어섰다. 파도에 구불구불하게 깎인 절벽의 단면은 크레이프를 켜켜이 쌓아 올린 케이크 같았다. 파도 소리 위에 아빠 목소리가 함께 올라왔다. 여기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지?라며 용의 머리와 닮아서 생긴 이름의 유래와, 절벽의 독특한 모양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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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찍은 사진
바다와 절벽 사이를 걷다 보니 좌판을 펼치고 해산물을 파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아빠와 함께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쪼그려 앉아 꼬들한 해삼과 바다향 가득 담긴 멍게를 먹으며 바다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겠지. 피식 웃음이 났다. 아빠와 함께한 기억들이 한걸음 한걸음 디딜 때 마다 조금씩 흘러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바다 위로 더욱 선명한, 또다른 무지개가 나타났다. 비는 이미 그쳤고,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희미해질 정도로 새파란 하늘 위 무지개는 가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 순간을 더 즐기라고 하늘에서 아빠가 보낸 선물일까?’ 무지개를 바라보며 아빠를 생각했다. 그 순간 만큼은 아빠가 곁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아빠가 있었다면, 무지개 앞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나도 피사체가 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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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찍은 사진
한 시간 남짓의 트래킹은 오랜만에 아빠와 데이트를 한 기분으로 채워졌다. 돌아오는 길엔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제주에서 나는, 바다뿐 아니라 따뜻한 추억까지 함께 충전하고 왔나보다.
아빠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앞으로도 우연한 순간에 만나게 될 것 같다. 그런 선물 같은 순간이 조금 더 자주 찾아오면 좋겠다.
비가 그친 뒤, 예고 없이 찾아온 무지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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