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말과 연초는 한국에서 보낸다. 크리스마스를 끼고 주어지는 며칠간의 특별휴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어서이기도 했고, 업무적으로 부담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옷장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캐리어에 귀국 선물을 차곡차곡 넣으며, 이번엔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건네고 어디를 갈지 떠올리는 설렘이 현실이 되는 순간, 우리의 연말 한국 여행은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파워 J답게 더위가 가시고 나면 한국에서 보낼 겨울을 준비한다. 귀국 선물로 굳어진 트레이더 조 미니 에코백을 사기 위해 출시일에 맞춰 재택근무를 신청하고, 오픈런을 감행한다. 올해는 할로윈 에디션을 잔뜩 사 두었다.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내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르라고 하기도 했다. 건강검진을 예약하고, 단골 미용실 원장님께 연락을 드리고, 달력을 펴서 서울과 청주를 언제 어떻게 오갈지 계산하는 시간. 올해는 세모문 필진이었던 설아 작가님의 펜션에 머물 기회를 얻어, 일정에 맞춰 발행일을 조정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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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약 없이 이어지던 연방정부 셧다운이 발목을 잡았다. 예산안을 두고 정치권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많은 공무원은 무기한 행정휴직에 들어갔다. 생활비 때문에 대출을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한동안 텅 비었던 출퇴근길을 보며 실감났다. 한 달이 넘어가도 끝날 기미가 없는 셧다운을 보며, 과연 이 상태로 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커졌다. 이번 한국행에서는 남편의 비자를 연장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셧다운 중에도 긴급 업무는 처리되지만, 우리의 비자연장이 그 안에 포함될 것 같지 않았다.
혹시 거절된다면? 한국에는 들어갔는데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면? 실제로 입국 거절 사례가 늘고 있던 터라, 이 정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가야 하는지를 하나씩 따져보기 시작했다. 상담할 만한 사람들마저 모두 업무가 중단된 상황.
결국 11월 초,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를 취소했다. 계획한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게 이렇게나 괴롭다니, 난 정말 파워 J가 맞나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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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로 했던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식을 전했다. “이번 겨울엔 못 가게 되었다”는 짧은 말만으로도 이유를 짐작하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더 촘촘하게 계획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며 캘린더 속 일정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연초에 아이의 입시 시험 일정도 있어, 잘된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한국 가서 해야지 하고 미뤄둔 일들을 여기서 하나씩 처리했다. 부러지면 본드로 붙이기를 반복하던 아이의 안경을 새로 맞추고, 아침마다 고데기로 겨우 수습하던 머리도 큰맘 먹고 펌을 했다. 그런데 묘하게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기운이 쭉 빠졌다.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눈앞의 일을 처리하기에도 모자란 에너지를 바닥부터 닥닥 그러모아 이메일 한 통을 보내고, 무너지기 직전의 빨래 더미를 세탁기에 넣었다가 건조기로 옮기며,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에 최소한으로만 반응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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셧다운이 끝나자 출근길에 다시 차가 늘었다. 한동안 닫혀 있던 스미소니언 미술관과 박물관도 재개관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전시 정보 하나에 눈길이 머물렀다.
스미소니언 아시아 미술관에서 《한국의 보물: 모으고, 간직하고, 나누다》라는 특별전이 열린다는 소식. 국립중앙박물관 뮤지엄 숍의 ‘뮷즈’도 함께 들어온다고 했다. 가라앉았던 마음에 아주 작은 불씨 같은 설렘이 되살아났다.
오후 반차를 냈다. 한국에 못 가게 되었으니 한국 전시라도 보러 간다, 이런 비장한 마음은 아니었고, 그저 일상에 작게나마 상쾌함을 더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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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30분, 산책이라 여기기로 했다. 걷다 보니 문득, 내가 왜 평일에 연차까지 내고 이 먼 길을 걷고 있는지 의문이 스쳤다. 꼭 보고 싶은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결국 한국에서 왔다는 국중박의 뮷즈라도 한번 보자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술관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전시관 두 개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지만, 생각보다 오랫동안 머물렀다. 평소라면 스쳐 지나갔을 전시 기획 의도나 작품 소개를 꼼꼼히 읽었고, 작품과 공간, 사람을 이어주는 이야기를 강조하는 ‘Connecting stories’라는 슬로건을 눈에 담았다. 한국 전시실에 들어서자 백자가 먼저 보였고, 그 옆엔 백자를 오브제로 삼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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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소니언 아시안 미술관, <한국의 보물> 특별전시, 직접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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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에 앉아 작품들과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대화하듯, 알고 있던 작품들과 새로 발견한 작품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연회의 한 장면을 기록한 의궤를 보며 행사 실무자로서의 나를 떠올리기도 했다. 문 밖에 서 있는 나인들의 모습이, 행사장을 오가던 나와 겹쳐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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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소니언 아시안 미술관, <한국의 보물> 특별전시, 직접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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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거리만큼은 아니지만, 한동안 멈춰 있던 도심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멈추었던 일상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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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지, 세심한 기획의도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전시실을 다 둘러보고 나오자 바로 기념품 샵이 보였다. 메인 매대엔 한국에서 막 들여온 뮷즈들이 가득했다. 백자 모양의 냉장고 자석, 연꽃 모양의 접시들, 손에 들고 만져보고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나전소반 만들기 같은 체험 굿즈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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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얼마 전 TV에서 본 국중박 뮷즈 기획자의 인터뷰에 등장하던 파스텔 버전 반가사유상이 눈에 들어왔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라는 문구에 이끌려 푸른색 반가사유상을 집어 들었다. 한국에서는 품절이 잦다는 얘기도 떠올랐다. 소소한 득템의 기쁨, 그리고 한국에서 하려던 일 중 적어도 하나는 클리어했다는 뿌듯함. 굳어 있던 마음이 살짝 기지개를 켜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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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 언급된‘사유의 방’을 직접 가 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다녀온 사람들의 말로는 도저히 사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다고 한다.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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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표를 취소하고, 기계적으로 벌려놓은 일정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며 놓치고 있었던 마음이 있었나 보다. 내가 기다렸던 ‘연말 휴가’가 한 해를 마무리할 기회였다는 걸, 뒤늦게야 실감했다. 가족들에게는 “이번 겨울에 못 가는 거지, 아예 안 가는 건 아니야”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내가 더 서운했는지도 모르겠다. 매년 반복되던 마음의 리듬이 끊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졌던 것 같다.
박물관을 나오며 생각했다. 이곳에서도 내 마음이 기대고 싶어하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꼭 한국에 가야만 한 해를 정리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정신없이 반짝이던 축제 같은 연말 대신 집에서 셋이 보내는 첫 번째 겨울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스스로에게 건네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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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겨울은, 어쩌면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볼 기회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공기가 그리울 때, 전시실 바닥에서 울리던 조용한 발자국 소리와 작품 앞에서 멈춰 서 있던 순간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비행기를 타야만 충전될 거라 믿었던 마음이 뜻밖의 방식으로 조금씩 돌아오는 걸 보며, 자꾸 없는 것만 헤아리던 마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처음’의 순간들로 채워보기로 했다.
아마도 이번 겨울은, 낯설지만 새로운 리듬을 배우는 계절이 될 것이다. 북적임 대신 내가 놓치고 지나갔던 이곳의 풍경과 감정들을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다. 눈이 내리는 우리 집은 어떨까, 이곳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어떤 모습일까. 그렇게 허전함 대신 조금은 다른 결의 설렘으로 이 계절을 지나가보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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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서서] 황진영
미국 Washington DC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우리’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공저 <세상의 모든 청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퇴사하면 큰일 날 줄 알았지> 를 썼습니다.
양 극단으로 보이는 개념들은 어쩌면 서로 맞닿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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