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드라마 <다 이루어질지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는 정호승 시인의 구절이 한 드라마에 등장했다. 이렇게 된 김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 시 구절을 이해해 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당근마켓 사기 없고, 불륜 없고, 보이스피싱 없는 세상이 될까. 월요병이 덜하고, 지옥철에서도 마주치면 웃고, 지갑 잃어버려도 주워 가는 사람 없을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오늘의 하루한시를 띄운다.
<다 이루어질지니>에서 감정이 결여된 가영(수지 분)에게 슬픔은, 지니에게 빌 수 있는 마지막 소원이었다. “돌멩이를 보석처럼 키워준 우리 할머니의 고통을 알고 싶어. 손가락질하면서도 날 키운 동네 사람들의 두려움을 알고 싶어. 날 이해하려고 한 민지의 우정을 알고 싶어. 네가 램프 바닥에 쓴 글들의 깊이를 알고 싶어. 나에게 인간성을 갖게 해줘. 하루만. 딱 하루만, 평범하고 온전한 감정이라는 걸 내게 줘.”
(지니가 소원을 이루어주고) 잠시 뒤, 가영은 운다. 울부짖는다.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진다. 심장이 아픈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뒤늦게 자신을 사랑한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가영의 슬픔은, 그녀를 사랑한 할머니가 바라던 꿈이기도 했다. "이 할매는 우리 가영이가, 우리 기쁜 내 새끼가, 그리움에 사무치가 울어도 보고, 기쁨에 놀래가 웃어도 보고, 그랬으면 좋겠거든."
어린 시절의 나는, 오히려 반대의 소원을 빌던 아이였다. “슬픔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해 줘. 기쁨을 온전히 느끼게 해 줘.” 슬픔이 파도라면, 기쁨은 해변의 조개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파도는 바람처럼 불어오고, 도망치느라 조개 줍는 법을 잊었다. 부모님의 싸움이나 교우관계의 어려움, 성적에 대한 압박 같은 '슬픔'에 비해 웃을 수 있는 '기쁨'의 순간은 너무 적었기에.
그런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됐던 건, 시였다.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운명처럼 등장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정호승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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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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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고 어린 내가 깨달은 것은, 슬픔의 유용함이었다. 나에게는 기쁨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어차피 슬픔도 사랑해 버릴 거라면, 기쁨이나 슬픔이나 별반 차이가 없겠다. 심지어는, 슬픔이 삶을 더 값지게 만들어줄 거다, 그런 생각.
어린 애가 한 생각치고는 너무 애늙은이같지만, 진짜로 시는 어린 나의 마음을 달래주었고, 나는 무사히 밤을 보내는 시간이 계속됐다.
지금의 나는 안다. 그때 내가 '슬픔의 유용함’을 발견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인간성의 진보였는지.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시인의 선언처럼, '나의 현재'와 '감정의 진실함'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되어주었다.
드라마 속 가영이 딱 하루, 온전한 감정을 바랐던 이유도,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과 '그늘'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인간'이 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만'을 비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주겠다'는 고백이야말로 상대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겠다는 위로의 맹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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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명 - 서나연
*코너 제목 - 하루 한시 ㅣ 에세이 쓰다, 시를 배우다
*코너 소개 - 에세이를 쓰다 시를 배우게 된, 엄마이자 작가의 기록. 시 한 편을 중심으로, 일상의 감정과 나름의 결론을 햄버거처럼 차곡차곡 쌓아 전합니다. 가끔은 뜨겁고, 가끔은 물컹한 한입을 함께 나눠요.
*작가 소개 - 문예창작과를 나와 유독 ‘시’감성이 충만한 글러버입니다. 매일 쓰고, 다듬으며 살아갑니다. 공저 에세이집 <전지적 언니 시점> 등을 펴냈고, 지금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무엇이 될까요?” 그 질문이 저를 살게 합니다. 언젠가, 저는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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