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금요일 저녁, 족발을 배달 시켜 신나게 맥주를 마시던 중이었다. 일찍 퇴근한 남편과 내일 갈 캠핑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립톡이 부착되어 서 있던 남편 핸드폰 화면에 카톡 새로 알림이 떴다. 내가 "카톡 왔다"고 하자 카톡을 확인한 남편이 말했다.
"황지은(가명)이네."
그리고 바로 내게 화면을 보여줬다.
"오빠, 잘 지내고 있지? 😊"
내가 말했다.
"미친."
그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빡침이 올라온다. 나는 말했다.
"얘 몇 년전에 결혼하지 않았어? 아니, 유부녀가 유부남한테 왜 연락을 해?"
황지은은 남편과 나의 공통된 고등학교 후배다. 남편이 한 살 연하라, 남편에겐 일 년 후배고 나한테는 이 년 후배다. 당연히 나보다는 남편과 가까웠고 고등학교 때부터 남편을 잘 따랐다. 그 애는 우리 결혼식 때도 왔었다.
나는 차분하려고 노력했다. 남편이 사심이 없다는 건 카톡이 오자마자 나에게 보여준 행동으로 확인이 된다. 그런데 왜 화가 나는 걸까? 몇 년 전부터 그 애는 이미 결혼한 남편에게 여러 번 만나자고 연락해왔다. 그 애가 직접 남편 직장 근처로 와서 점심 먹기로 약속을 잡은 적도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그 애가 갑자기 취소했고, 다른 한 번은 남편 회사 일 때문에 무산되었지만 만나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거슬리고 불쾌했다.
생각해볼수록 욕이 나온다. 이래서 글을 쓰는 거겠지?
사실 유부녀가 유부남에게, 유부남이 유부녀에게 연락을 하면 안 된다는 법칙 같은 건 없다. 왜 안 되는 건지도 논리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냥 죽도록 맘에 안 드는 것뿐.
남편이, "별뜻 없이 연락한 거겠지. 그래도 다른 후배들은 연락도 없는데 이렇게 몇 년마다 꾸준히 연락하는게...한편으론 고마운 거지 뭐"하며 잠시 망설였다. 사실 남편도 이 상황이 불편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별일 아니라 넘기는 게 맞는지, 어떻게 정리하는 게 좋은지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말했다.
"그래서, 지금 와서 뭐 우정을 쌓을 거야 뭐야? 뭘 할 건데? 과거의 기억이 좋을 수는 있지. 근데 그건 아름다운 과거로 간직하면 되지. 그걸 현재로 이어가려고 하는 게 잘못됐어. 그리고 현재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절대 과거의 인연에게 연락하지 않아. 자기는 내가 유부남하고 연락하고 만나면 괜찮아?"
남편이 자기도 기분 별로 안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자기는 일이 바쁘다고 하고 웬만하면 안 만나려고 눈치를 줬는데도 그 애가 계속 연락을 한단다. 어쨌든 남편이 딴 마음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고 금요일 기분 잡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다시 캠핑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 날 캠핑 가서 텐트에서 자는데 나는 괴상한 꿈을 꾸었다. 황당하게도 평소 생각지도 않던 전 직장 동료 두 명이 꿈에 나왔다. 한 명은 내가 대리일 때 여자 과장님, 다른 한 명은 내가 뽑은 후배 여직원. 그 둘이 갑자기 내게 연락도 없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둘이 팔짱을 낀 채 우리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집을 구경하는 것이다. 특히 그 과장님은 꿈에서 대머리로 나왔다. 나는 너무 싫어서 꿈에서 울었다.
그 과장님은 우리 둘다 회사를 그만둔지 한참 뒤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와 돈을 빌려달라고 한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내 경계를 슬쩍 넘어온 사람이었다.
괴이한 꿈 때문인지 평상시보다 잠에서 일찍 깬 나는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챗GPT에게 내가 꾼 꿈을 설명하고 이게 무슨 의미인 거 같은지 물었다. 지피티가 말했다.
"과거의 인연이 너의 경계를 침범하는 꿈이야."
과거의 인연? 그럼 혹시...그 금요일의 후배 때문에? 어쩌면 생각보다 그 일이 내 무의식에 영향을 주고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바로잡아야 했다. 나는 꿈에서 깨어 한참을 앉아 있었고, 조금 뒤 남편이 일어났다. 나는 말했다.
"그때 황지은 어떻게 됐어?"
"아~ 전화 통화했어."
"뭐, 전화?"
순간 뚜껑이 열렸다. 내 의사를 확실히 표명해야 한다.
"자기가 걔한테 사심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걔 행동은 잘못 됐어. 나는 불쾌해. 자기는 내가 유부남하고 연락하는 게 괜찮은지 모르겠는데... 아니, 자기가 괜찮아도 내가 불쾌해서 안 돼. 지금 걔의 행동은 나를 무시하는 거야. 나를 배제하고 둘만의 뭔가를 쌓아가려는 건 잘못됐어. 내가 싫어한다고 해. 내가 싫어해서 못 만난다고 말해."
남편이 다음에 연락오면 그렇게 말하겠다고 했다. 나는 명확히 내 의사를 전달했고, 남편도 진지하게 듣고 수긍했다. 사실 남편은 이전부터 그 상황이 조금 불편했지만, 어떻게 선을 그어야 할지 명분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 명분을 내가 확실히 줘야 했던 거다. 내가 먼저 그 애와 인연을 끊어버리기로 결심해야 했던 게 맞았다.
예전에 그 애가 남편에게 연락해 점심 먹자고 했을 때 그냥 넘어갔던 건, 그 애에게 좋은 선배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 '에이, 걔도 뭐 그런 마음은 없겠지' 라고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던 태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남편에게 분명히 내 의사를 전달했고 그 애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기로 했다. 전혀 서운하지 않다. 후련하고 좋다. 그 정도의 얄프리한 인연 때문에 여태까지의 경계 침범, 그 거슬림을 참을 필요가 없었다.
아직도 왜 유부녀가 유부남에게 연락하면 안 되는지 논리적으로는 설명 못하겠다. 그냥 싫고, 싫다. 때로는 논리보다 감정적 진실이 더 중요하다. 사람마다 경계선은 다르지만, 그걸 흐리지 않고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건 결국 자기 감정을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에겐 이번 일이 그걸 다시 확인하는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