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는 곳에서 커피샵이라면 어디든 보이던, 제단처럼 보이던 커피 |
|
|
여름부터 연례 세미나를 준비했다. 올해 세미나는 워싱턴에서 열릴 차례였다. 6월 이후 잇다른 행정명령이 발표되고, 미국 여행 제한국가가 늘어나면서 참가자들의 입국이 어려워졌다. 결국 세미나 장소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로 바뀌었다. 내 첫 아프리카 출장은 그렇게 한 달 전 갑자기 결정되었다.
아프리카에 가려면 황열병이나 말라리아 등 예방접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막연히 들어왔기에 출장지가 확정되자마자 회사 내 여행 클리닉을 찾았다. 직원은 나라, 체류 지역, 숙소 위치, 현지 방문 계획 등을 묻더니 ‘옐로 북(Yellow Book)’이라 불리는 접종 기록 카드를 내밀었다. 성인이 된 뒤 임신과 출산을 거치며 아이 예방접종만 챙겼지, 내 접종 기록은 잊고 지낸 지 오래였다. 황열병 주사만 맞으면 될 줄 알았는데, T-dap(파상풍·디프테리아·백일해), 간염, 뇌수막염, 소아마비, 장티푸스까지 빼곡한 접종 목록 중 그날만 다섯 방의 주사를 맞았다.
오지를 가지 않는다면 말라리아 약은 필요 없다는 말에 그나마 안도했다. 말라리아 약을 먹고나면 구토나 오심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는 얘기를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
|
|
현지 정보를 검색하다 날씨예보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12도에서 24도라니. 아프리카라도 덥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9월 초에 12도라니 뜻밖이었다. 게다가 매일 비 예보. 9월의 에티오피아는 우기였다.
한국의 장마와 달리 매일 비가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지는 시기. 실제로 출장 내내 비가 내렸다. 혹시 몰라 챙긴 비옷과 얇은 잠바, 비장의 무기 핫팩 덕분에 세미나를 무사히 마쳤다.
출장 여정은 모두 사내 시스템에 등록된다. 이 기록은 항공권을 예매해주는 여행사와 현지 보안 책임자에게 공유된다항공권 예매사와 현지 보안 담당자에게 공유되는데, 이번엔 보안 질문도 까다롭고 제출 자료도 많았다.
말로만 듣던 FCV(Fragility, Conflict and Violence: 취약성, 분쟁, 폭력) 국가에 가는구나 싶어 긴장이 됐다. 내가 하는 업무는 도심 호텔과 정부 기관 건물에서 진행되니 위험할 건 없겠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불안이 톡톡 솟았다.
공항 입국 심사대는 아수라장이었다. 수천 명이 회담 개최를 위해 아디스 아바바를 찾는다니 당연한 일이지만, 길게 늘어선 줄에서 이미 피로가 몰려왔다. 초청장과 비자를 내밀며 긴장했다. 입국장을 나오자 무장 경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불필요한 이동은 줄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시내 건물은 철제 울타리로 요새처럼 둘러싸여 있었고, 어디를 들어가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
|
|
출장이든 여행이든, 누구나 ‘현지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고 싶다. 나도 그랬다. 참가자들과, 동료들과, 두 번이나 에티오피아 전통 춤과 노래 공연이 있는 곳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첫번째로 방문한 식당은 음식을 팔긴 했지만, 무대가 중심이라 식당보다는 극장에 가까웠다. 각종 악기를 든 연주자, 머리와 어깨가 따로 노는 듯한 댄서들, 상모 돌리듯 곱슬머리를 흔드는 장면은 신기하면서도 경이로웠다.
대화하다가도 격한 동작이 나오면 멈추고, 모두가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했다. 음식은 전통 방식으로 서빙됐다. 항아리로 손을 씻고, 작은 화로와 함께 인제라(발효 전병)에 Sega wot이라 불리는 소고기 스튜를 올려 Awaza라는 매운 소스와 함께 손으로 싸먹었다. 인당 30~40달러 정도의 가성비 만점의 ‘로컬 체험’이었다. |
|
|
세미나가 끝난 날은 너무 피곤해 저녁도 굶고 잠들었는데, 동료들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맥주 한 잔은 하자는 제안에 마지못해 나섰다. 근처 글로벌 호텔 체인 안의 문화 센터 공연장이었다. 두 번째라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피곤해서였을까. 공연에도, 대화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모든걸 내려놓고 즐기는 주변 사람들과 내가 분리된 느낌이랄까.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현지인을 구경하러 온 이방인 사이에 끼어있지만, 그 시간을 즐기지도 못하는 프로불편러가 된 느낌이었다. 그날은 에티오피아의 새해 전날, 섣달 그믐이었고, 자정이 가까워오자 음악은 한껏 고조되었다. 우리 그룹에도 흥이 난 사람들이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흥을 돋구던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무대에 올라오기를 청했다. 무대 위 흥겨움 속으로 스며드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가방을 지킨다는 핑계로 남았다. 사실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들어 무대와 관객들을 찍으며, 내가 원했던 ‘현지 경험’이 이런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
|
|
호텔 지하에 위치한 문화 체험 공연장 (직접 촬영) |
|
|
내가 바란 건 함께 앉아 삶을 이야기하는 순간이지, 호텔 지하 클럽에서 소비되는 ‘편집된 현지성’이 아니었다. 대접이 아니라 대화. 구경이 아니라 삶의 나눔, 피곤함이 불러온 나 혼자만의 지나친 예민함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이 떠오른 이상 노래도, 춤도 온전히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
|
|
다음날 공원에서 마주친 한 무리의 아이들은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춤을 추었다. 돈을 달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갖고 있던 현지 화폐를 아이들에게 건넸다. 짐을 챙겨 체크아웃을 하려고 방을 나서는데, 초등학생 쯤 되어보이는 아이와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두 아이를 마주했다.
손으로 그려 색연필로 칠한 에티오피아의 국화, 아디 아바바가 있었다. 그림을 받아들고 바로 돈을 주는 것과 어떤 의도로 이 그림을 나에게 주느냐고 묻는 것 중 어느 것이 덜 실례일까를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작은 아이를 달래며 큰 아이가 말했다. “이 친구가 학교에 가야하는데, 돈이 부족해요.”
후회했다. 그냥 그림을 받아서 고맙다고, 그래서 주는거라고 했어야 했다. 멋쩍음과 미안함이 섞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로비로 향했다. 그런데 로비에서 만난 동료들과 세미나 참가자들도 그들을 만난듯 했다. 두 친구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영업을 하기로 했나보다. 알고도 속기를 선택했지만, 속았다는 기분보다 더 불편했던 건, 호텔 안에서조차 ‘안전할 권리’가 깨졌다는 감각이었다. |
|
|
20대 초, 마닐라에서 본 거리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낡은 보도블록 틈 깨진 수도관에서 빗물로 머리를 감던 모습, 신호에 멈춘 택시 창밖으로 불쑥 나타나 창을 두드리던 간절한 눈빛들. 한동안 잊고 있던 장면들이 다시 솟아올랐다.
과연 우리는 우리기 이루고자 했던 세계 빈곤의 종결이라는 목표를 이루었나, 아니면, 새로운 목표를 위해 누군가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걸까. 생각이 복잡해질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
|
|
국제기구에서 일하다 보면 ‘글로벌 소양’을 갖춰야 한다고 하지만, 실수는 생기기 마련이다. 예컨대 비주류 문화에서 온 사람은 개별 주체가 아니라 집단 이름으로만 불리는 경우가 많다.
한 회의에서 어떤 참가자가 발언권을 요청하자 의장이 “저기 아프리카에서 오신 신사분”이라 부른 일이 있었다. 다른 이들은 기관명이나 국가명으로 불렸는데, 오직 그에게만 집단의 이름이 붙었다. 의장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단순한 말실수라 할 수 있겠지만, 그 말이 던져진 순간 개인은 지워지고 집단만 남았다. 나 역시 이름보다 “(한국에서 온) 아가씨”라고 불린 적이 많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더 이상 “어디 붙어 있는 나라냐” “남한이냐 북한이냐” “아직도 전쟁 중이냐” 같은 질문은 듣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출장에서 나는 내가 모르고 있던 의외의 습관을 동료들을 통해 발견했다.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한국”이 아니라 “남한(South Korea)”이라고 답하고 있던 것이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혹시 이어질 , 알면서도 꼬치꼬치 이어지는 무례한 질문 세례를 피하려는 무의식이었을까, 아니면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한국 전쟁 참전을 언급하며 “우리는 형제의 나라”라고 했기 때문이었을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형제의 나라는 터키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중에 찾아보니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6천 명 규모의 병력을 한국전에 파병한 나라였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더 적극적으로 감사를 전했을 텐데, 그 후로는 만나는 이들에게 최대한의 마음을 담아 “고맙다”고 인사했다. |
|
|
다섯 방의 주사와 피검사 끝에 받은 접종카드, 옐로 북은 출국 때도, 미국 재입국 때도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주사를 맞고 헤롱거리던 며칠, 종종거리며 시간을 쪼개 클리닉에 다녀온 수고가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황열병은 평생 한 번만 맞으면 되는 주사라 하니, 언젠가 또 필요한 나라에 간다면 그만큼은 덜 수고한 셈이다.
미국 입국 심사에서 받은 질문은 단 두 가지였다. “현금 얼마 들고 있니?” “축산품 가져왔니?”
현금이 얼마더라, 하며 지갑을 꺼내려는 나를 눈빛으로 제지하며 이어지는 건조한 한마디,
“잘 왔어.”
그렇게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음에 다른 출장지에 가게된다면, 그때는 조금 더 노련하게, 조금 더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
|
|
[사이에 서서] 황진영
미국 Washington DC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우리’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공저 <세상의 모든 청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퇴사하면 큰일 날 줄 알았지> 를 썼습니다.
양 극단으로 보이는 개념들은 어쩌면 서로 맞닿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