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이 힙을 알아?
‘hip’, 그리고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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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는 ‘힙(hip)’이 넘쳐난다. 바야흐로 ‘힙’이 힙한 세상이다.
혹시라도, ‘힙’이라는 단어가 낯선 분들을 위해 짧게 설명하자면, ‘힙’은 ‘뻔하지 않고, 남다르고, 멋지고, 새로운’ 무언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마디로 멋지고 좋은 건 웬만하면 다 ‘힙’의 범주에 들어간다.
“‘hip’은 엉덩이 아닌가?”라며 당황할 분들을 위해 또 한 마디를 보태자면, 맞다. 엉덩이나 고관절을 가리키는 바로 그 ‘힙’이 자유자재로 변신해 ‘멋지다’라는 의미를 품게 됐다.
‘힙’과의 조우
‘힙’이라는 단어에 ‘엉덩이’ 말고 다른 뜻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20년쯤 전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얻은 첫 직장은 연구소였다. 연구원들이 작성한 한국어 보고서를 영어로 번역해서 매주 잡지를 만드는 것이 내 일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의 삶이 대개 그렇듯, 실제 주된 일과는 중간에 끼인 새우 신세가 되어 언제 고래 싸움에 등 터질지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하나의 글이 완성되는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원저자인 연구원이 글을 완성해서 넘겨주면, 나를 비롯한 번역가들이 먼저 영어로 글을 옮겼다. 그다음은 외국 신문사에서 오래 일했던 노령의 수석 에디터 차례였다. 뻔한 글을 혐오했던 수석 에디터는 늘 화려한 표현과 과장된 수식어를 사랑했다. 경제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뻔한 글에는 번쩍이는 수식어를 들이밀 자리가 많지 않았지만, 그는 의지는 언제나 확고했다.
수석 에디터의 입맛에 맞게 화려한 옷을 입은 글을 다시 깎아내는 건 외국인 에디터였다. 간단한 인사말 외에 한국어는 할 줄 몰랐던 외국인 에디터는 오직 ‘영어의, 영어에 의한, 영어를 위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무조건 영어답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강조했다. 이쯤 되면 끝이 나야 하지만, 마지막 단계는 언제나 원저자였다. 원저자의 허락 없이는 글을 배포할 수 없으니 글을 쓴 연구원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야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나의 글이 완성되는 동안 원저자와 번역가, 수석 에디터, 외국인 에디터는 텅 빈 스크린을 테니스 코트 삼아 한국어와 영어로 쓰인 문서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대개는 한쪽에서 서브를 넣으면 반대쪽에서 부드럽게 공을 받아치는 식의 랠리가 흥겹게 이어졌다. 그러나, 서브가 빗나가 상대 선수의 얼굴을 가격하는 것에 견줄 만한 사건이 벌어질 때도 있었다. 그 공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날도 있었고, 다른 누군가가 폭격을 맞는 일도 있었다.
원작자와 수석 에디터가 일대일 경기를 벌이는 코트 한가운데 선 신세가 되어 적의로 똘똘 뭉친 마음이 네트를 가르며 서로에게 날아가 꽂히는 모습을 직관한 날이 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못마땅해하며 갈등을 빚은 건 딱 한 단어 때문이었다. 소동의 원인이 된 단어가 바로 ‘hip’이었다.
한국 경제를 강타한 주요 트렌드를 소개하는 글의 제목으로 수석 에디터는 ‘Hip Trends’라는 표현을 골랐다. 연구원은 듣도 보도 못한 표현이라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hip’을 고른 사람이 어리디어린 번역가가 아닌 경험 많고 노련한 백발의 수석 에디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구원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난색을 보였다. 이 싸움의 결말은 연구원의 승리였다. 어쩔 수 없이 원저자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수석 에디터는 수화기 너머로 지루한 논쟁을 끝낸 후 나지막이 읊조렸다.
“너희들이 힙을 알아?”
힙은 언제부터 힙해졌을까
없던 말이 단숨에 생겨나기도 하고 오랫동안 표준어로 인정받았던 단어가 갑자기 틀린 말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라는 건 대개 물 흐르듯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져나간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힙’이 정확히 언제부터 이토록 인기를 끌었는지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에서 ‘힙’이 힙한 단어가 된 건 대체로 2010년대 중반부터라는 게 중론이다. ‘힙’이라는 단어를 놓고 연구원과 에디터가 대립했던 때는 2000년대 중반이었으니, 연구원이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어깃장을 놓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는 ‘힙’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엉덩이’가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사실 미국에도 힙이라는 단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명확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많은 언어학자들은 ‘힙’, 그리고 힙과 여러모로 닮은 ‘헵(hep)’이라는 단어가 서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들이 사용하던 말이라고 추정한다.
‘힙’이라는 단어에 ‘잘 알고 있는’, ‘세련된’, ‘멋진’ 같은 의미가 추가된 최초의 기록은 1904년에 등장했다. 미국 작가 조지 V. 호바트(George V. Hobart)는 1904년에 <짐 히키: 원 나잇 스탠드에 관한 이야기(Jim Hickey: A Story of One-Night Stands)>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비속어가 난무하는 이 소설에 "Danny, at this rate, it'll take about 629 shows to get us to Jersey City, are you hip?"이라는 문장이 있다. "대니, 이런 속도라면, 629번이나 쇼를 해야 저지시티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한 다음 "그거 알아?"라고 되묻기 위해 "hip"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힙’의 한살이
단 세 개의 알파벳으로 이뤄져 쓰기도 쉽고, 읽기도 쉬운 ‘힙’은 점점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표현이 됐다. 1930~40년대에는 흑인 중심의 재즈 문화가 널리 사랑받았고 ‘힙’의 인기도 함께 올라갔다.
그러나 말에도 한살이가 있다. 어디선가 조용히 태어난 말은 각자 저마다의 속도로 한참을 자라다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생명력을 잃고 사라진다.
‘힙’이라는 단어는 미국과 한국에서 각자 다른 시절을 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바야흐로 어디서나 ‘힙’이 인정받는 ‘힙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미국에서는 ‘힙’의 시대가 저물었다.
한없이 멋지게만 느껴지는 ‘힙’이라는 단어가 본토에서는 한물간 유행쯤으로 치부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미국에서는 어떤 단어가 ‘힙’을 대신하고 있을까?
답은 바로 ‘fire’다. ‘fire’라는 단어에 ‘멋진’, ‘끝내주는’ 같은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사전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사용하긴 하지만, 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은 신조어의 의미가 궁금할 때는 ‘어번딕셔너리(Urban Dictionary, https://www.urbandictionary.com/ )만큼 유용한 게 없다.
어번딕셔너리에서 ‘fire’를 검색하면 "really good(정말 좋은), cool as hell(끝내주게 멋진)"이라는 정의가 나온다. 'fire'가 사용된 예문으로 "That girl is looking fire.(저 여자 완전 끝내주는데!)", "Damn this food is fire.(이거 완전 존맛탱인데.)" 등이 소개돼 있다. 그 외에도 ‘fire’라는 단어를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영어 사용자들이 달아놓은 정의를 보면, ‘fire’가 ‘정말 멋진’ 혹은 ‘끝내주는’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영어 문장에서 ‘fire’를 사용할 때는 ‘cool’, ‘hip’, ‘trendy’ 같은 형용사처럼 활용하면 된다.
예를 들면, 멋진 옷을 입고 나온 친구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Your outfit is fire! (너 옷 정말 죽인다!)”
혹은, 방금 들은 노래가 정말 좋다면, 이렇게 말해도 된다.
“This song is fire! (이 노래 끝내줘!)”
미국에서 그랬듯,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 ‘힙’의 인기가 시들해질지도 모른다. 그때, ‘힙’의 뒤를 이어 ‘파이어’의 시대가 오면, 크게 외쳐보자.
“That’s fire! (진짜 멋진데?!)”
- fire의 자매품으로 awesome, cool, lit, sick도 있다. (모두 '정말 멋진', '끝내주는'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로 사용된다.)
[번역가의 슬기로운 언어 생활]
번역가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언어, 그 너머의 문화와 사람 이야기.
글쓴이: 김현정
현직 번역가. <경제 저격수의 고백> 등 50여 권의 책을 번역했습니다. 꿈은 김 작가. 이제 다른 사람의 글을 옮기기보다 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브런치 이메일: iamwriting72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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