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왈츠, 내 걸음대로
- <황홀한 출산> 리뷰 -
텅 빈 아기집, 엄마의 첫걸음
얼마 전 한 살이 된 우리 아기 태명은 ‘왈츠’였다. 왈츠가 찾아오기 전 나는 첫 임신을 짧게 경험했었다. 첫 임신 준비는 결혼 생활이 5년을 갓 넘기고, 내 나이가 노산에 임박했을 무렵이었다. 남편과 나는 임신을 계획하며 자동차를 구매하고, 집 주변에 평판 좋은 병원과 조리원도 알아 두었다. 다른 한편으로 1년 동안 매주 화요일은 직장에서 오전 근무만 하고 관심 분야 수업을 듣기로 계획했다. 언제 될지 모를 임신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고, 육아가 시작되면 자기 계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질 거로 생각했다.
어느 주말, 몸에서 보내는 신호가 예사롭지 않아 병원을 갔다. 임신 5주 차였다. 의사는 2주 후에 아기 심장 소리를 확인 할 수 있다고 했다. ‘12개월 교육 과정 중 1주가 지났는데 임신이라니, 약 9개월 후 출산이라니!’.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나름 준비한 일이기에 나쁘지 않았다. 아기 소식에 양가 부모님들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고 그때 서야 나는 마음 편히 임신을 반가워했다. 그러던 중, 아기 심장 소리를 듣기로 한 2주가 되지 않았는데 병원에 갈 일이 생겼다. 아기집은 텅 비어 있었다. 의사는 아기가 늦게 보이는 경우가 있으니 1주 후에 다시 보자고 했다. 그리고 이틀 후, 결국 유산을 진단받은 후 회사에 유산 휴가를 신청했다.
휴가 이틀째, 집에서 혼자 멍하게 누워있던 나는 배가 아팠다. 그리고 아주 작은 핏덩이를 직접 확인했다. 의사가 곧 자연 배출될 거라고 했던 아기집이었다. 생명의 무게와 엄마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갑작스레 밀려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아기를 키울 환경을 갖추는 데 애를 쓰긴 했지만, 엄마의 몸과 마음으로 생명을 품는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음을 알아챘다. 그날 밤, 미숙했던 나의 마음가짐이 유산의 원인이 된 것만 같아 괴로웠다.
내가 찾던 출산, 자연스러움의 세계
나는 지인들이나 미디어를 통해 임신,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상과 감정이 있었다. 여성의 몸에 상처를 내고 그 틈으로 나오는 아기, 그 아픔을 참고 아기를 낳는 여성이 엄마가 되는 거라고 여겼다. 우리 엄마의 배에 있는 제왕절개 자국도, 내가 처음 접한 출산의 흔적이다. 생명을 맞이하는 순간이 병상 위에서 환자처럼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육아 우울증, 워킹맘의 고충과 같은 이야기는 반갑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주변 현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엄마가 되어 가는 과정은 고통과 희생만이 아니기를 희망하곤 했다.
유산 휴가 마지막 날 저녁,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중 추위를 피하려고 눈앞에 보이는 중고 서점에 들어갔다. 서점 안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 어딘지 찾다가 내 눈에 들어온 임신, 출산, 육아 코너로 향했다. 그리고 이어 내 손이 닿은 곳은 <황홀한 출산>이라는 책이었다. 출산을 ‘황홀함’으로 형용한 것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고, 혹시나 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출산은 아닐지 하는 마음에 빠르게 자리를 잡고 책장을 넘겼다.
책에서 나는 ‘자연주의 출산’을 처음 알게 되었다. 출산을 두려움과 고통이 아닌 육체·정신·영적으로 황홀한 경험으로 묘사하는 글들이 나의 마음속에 깊게 와닿았다. 여성이 가진 직감과 지혜, 그리고 아기 몸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따라가다 보면 의료 개입을 최소화하여 엄마 스스로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찾던 출산의 모습을 말해 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텅 빈 아기집이 이 책을 만나게 해준 것 같아 감사했다. 그렇게 나는 서점에서 <황홀한 출산>을 우리집 책장으로 옮겨가기로 했다. 우리집 거실 책장에 그 책을 꽂는 순간, 나는 엄마가 될 마음의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책에 따르면 자연주의 출산에서는 산부인과 전문의뿐 아니라 조산사와 둘라가 산모를 돕는다. 조산사는 의학 지식과 자격을 갖춘 출산 전문 의료인으로, 임신부터 출산·산후까지 산모의 건강을 꾸준히 관리하고 분만을 직접 진행한다. 반면 둘라는 의료인이 아니지만, 출산 전후로 심리적 안정과 정서적 지지,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해 산모가 편안하게 출산 과정을 겪을 수 있도록 돕는다. 책의 두 저자는 각각 조산사, 둘라 출신이라 본인들이 경험한 현장에서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또 자연주의 출산을 위한 임신 기간의 준비 사항들을 매뉴얼처럼 소개한다. 엄마와 아기, 가족의 확장을 함께하는 지지자들이 있는 출산이라니 재미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책장을 한장씩 넘길 때마다, 책 속의 낯선 이름들의 산모들이 든든한 친구인 것 마냥 가깝게 느껴졌다.
관련 용어도 아기와 엄마 입장에서 변환한 것이 많았다. 특히, 진통을 ‘파도’라고 부르는 것이 인상깊었다. 무엇보다 출산이 산모뿐만 아니라 그 배우자, 나아가 한 가정의 삶의 방식에 깊은 영향을 주는 중요한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모든 여성은 아기를 낳을 지혜를 가지고 있고, 가장 편안하고 온전한 환경에서 우리의 몸이 그렇게 변화할 수 있다고 전한다. 운명처럼 책의 추천사를 쓴 산부인과 전문의 정 원장님의 병원이 우리집 근방에 있기도 했다.
아기 왈츠, 엄마의 왈츠
<황홀한 출산>이 우리집 책장에 자리 잡은 날로부터 약 3개월 뒤, 정 원장님을 통해 ‘왈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원장님에게 책을 보고 왔다는 말을 하니, 맛집 찾아오듯 산부인과에 온 가족은 처음이라며 반겨주었다. 그러고는 “자연주의 출산을 하려면 엄마의 마음과 몸 모두 준비되어야 하고, 의료진은 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엄마와 아기가 주인공이며, 아빠는 주인공들을 잘 돌봐야 해요. 파이팅”. 이라고 말했다. 원장님과의 첫 만남은 임신 확인 진료라고 하기보다, 예비 부모인 우리를 응원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기 태명은 우리 부부가 왈츠 피아노 연주회를 다녀온 즈음에 생긴 것 같아 붙인 것인데,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와중에 생명이 찾아와 감사하고 신기했다. 나는 다시 책에 나오는 출산을 위한 준비 사항을 읽고 생활로 옮겨왔다. 임신 안정기가 되어서는, 나의 전담 조산사와 둘라도 정해졌다. 자연주의 출산이 누군가에게는 꽤 까다롭고 유별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식단, 운동, 내면 관리까지 해야 하는 과정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평소에도 건강한 음식을 스스로 해 먹는 것을 좋아하고, 운동을 통해 심신을 다스리는 것을 일상화했기에 임신 준비가 부단히 애써야 하는 것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왈츠의 탄생을 기다리며 나답게 임신 기간을 보내고 출산 준비를 하는 과정은, 다시 돌이켜봐도 뜻깊고 풍요로웠다.
물론, ‘내가 정말 자연주의 출산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불쑥불쑥 올라오긴 했다. 특히, 자연주의 출산이 익숙하지 않은 주변의 반응에 나도 함께 흔들리기도 했다. 우리 엄마조차 나의 출산예정일이 임박할 무렵, ‘그게 정말 가능할까?’라며 나 몰래 남편에게 걱정과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남편은 ‘왈츠 엄마를 믿어요. 잘 해낼 것이라 확신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책에서 만난 지지자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왈츠와 나의 방식대로 출산을 하리라 차곡차곡 다짐했다. 나는 그렇게 <황홀한 출산>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더불어 나의 남편의 뜨거운 지지지지 속에서신 기간을 보냈다.
출산 예정일을 열흘 앞둔 밤, 왈츠의 파도(진통)가 시작되었다. ‘이제 아기를 만나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파도를 맞이했다. 통증이 거세질 때도 곧 세상에 도착할 뱃속의 왈츠에게 편안함을 주고 싶었다. 분만실의 소음, 밝은 조명, 성급한 의료 행위가 아기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기에, 나는 집에서 최대한 파도에 몸을 맡기다가, 아기 문(자궁 문)이 열리고 핏방울이 보였을 때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 나의 둘라는 나와 남편을 맞이해주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함께 왈츠의 출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출산 방에 들어서자, 조산사의 반가운 미소가 보였다. 작은 침대와, 내 몸을 맡길 수 있는 쿠션, 아기를 받아낼 수건도 준비되어 있었다. 환자 침대, 의료기기는 없었다. 흔히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분만실 모습과는 동떨어진 모습이지만, 나의 마음에는 가장 가깝고 편안한 곳이었다.
2시간 정도 거센 파도를 집에서 온전히 받아내고 와서인지, 나는 병원에 도착해 몇 번의 호흡 끝에 왈츠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왈츠야, 세상에 온 걸 환영해.”라고 속삭였다. 책에서 말한 황홀함은 나에게 ‘흥분된 평화로움’이었다. 갓 태어난 꼬물거리는 작은 몸이 나의 따뜻한 몸 위에 올라왔을 때 왈츠를 꼭 안아주었다. 내 마음은 우아한 왈츠를 추듯 평화롭고 설렜다. 남편은 왈츠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을 정면으로 지켜봐서인지, 차분했던 나보다 더 황홀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병원에 도착해서 왈츠를 만나기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우리 가족의 새로운 탄생을 따뜻하게 지지해 준 이들과 함께, 고요하고 평화롭게 왈츠를 만난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왈츠를 만난 지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왔고, 몸도 빠르게 회복되어 씩씩하게 걸을 수 있었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모유 수유를 하고, 보고 싶었던 부모님과도 이야기를 나누며, 나와 남편은 왈츠와 24시간 내내 꼭 붙어있었다. 우리는 출산의 순간을 거듭 곱씹으며 그날의 온기와 감정을 꼭 붙잡고, 밤낮없는 신생아 육아 시절을 행복하고 평화롭게 보냈다. 저자들이 책 속에서 말했던 황홀한 출산, 그리고 그 기억을 통해 기꺼이 살아내는 육아의 하루하루가 이런 것임을 체감했다.
나의 10~20대는 세상을 분석하고 비판하느라 우울감이나 무력감에 휩싸이는 날이 꽤 있었다. 엄마가 된 나는 이제 우리 가정이 더 행복하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좀 더 나은 곳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왈츠와의 삶 속에서 커가는 나의 모습이 기대되고, 잘될 거라는 긍정의 힘도 발견하곤 한다. 나를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성취 목표를 수단 삼아 아등바등했던 나보다, 아기를 위해 온 마음을 쏟는 엄마인 내 모습이 풍요롭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나에게 잘 맞는 방식인 자연주의 출산을 선택한 것처럼, 모든 엄마와 아기가 자신에게 최선인 방식으로 출산의 순간을 마주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최선의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우리 왈츠의 인생을 함께할 세대일 테니까 말이다. 생명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나에게 온 첫 임신과, 그것을 계기로 만난 <황홀한 출산>, 책을 통해 알게 된 인연들은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큰 힘이 되었다. 한 생명을 일구는 것에 대한 무지함을 치유하고, 새로운 힘을 부여받는 경험을 하는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라 느낀다. 남편과 나는 왈츠와 만난 그 밤을 종종 추억하며,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만의 황홀한 육아를 한 걸음씩 이어갈 것이다.
* 글쓴이 - 야니(https://brunch.co.kr/@yanylab)
아기를 만나며 나를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엄마가 되기 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게 됩니다. 육아 속에서 아기와 내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기록하며, 이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