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삼만 원 시대, 시 한 편이 건네는 가성비 위로 [하루한시]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가까워지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다. 단 두 행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 시는 연탄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도 여전히 강한 울림을 준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전문
어린 시절, 남자 아이들이 빈 깡통이라도 발로 차면 못마땅했는데, 생각해보면 그때 이미 시 구절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 같다. 무엇이든 함부로 차면 안 된다는 메시지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맥락으로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이야기이지만,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물음은 삶의 중심에 콕 박혀 있어, 내가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되새김질하듯 떠오른다. 도덕 교과서보다도, 철학 책보다도 오래 남는 한 줄이 되었다.
1990년대 도시가스 보급 이후 연탄은 생활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연탄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겨울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골목 어귀에 쌓여 있는 시커먼 원형은 이제 낯설지만, 세대의 기억 속에서는 따뜻함의 표상이다.
언젠가 아이와 골목을 걷다 쌓인 연탄을 만났다. 시커먼 원형이 층층이 탑처럼 놓여 있었다. 아이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연탄 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려 했다. "만지면 안 돼. 손이 시커매질 거야." 아이는 킥킥 웃으며 내 손바닥에 자기 손을 비볐다. 까만 것도 괜찮다는 듯. 그 순간, 나는 연탄의 '뜨거움'이 꼭 아이의 장난기 같은 얼굴에서 번져 나오는 것 같았다. 단순히 연탄의 물리적 온기가 아니라, 시가 말하는 ‘뜨거움’의 의미와 맞닿아 있었다.
시는 왜 오래 남을까. 시는 철학이나 교리를 대신해, 작지만 확실한 불씨로 마음속에 타오른다. 그 불씨는 일상의 피곤함 속에서도 잠시나마 따뜻함을 준다. 안도현 시인의 연탄은 그래서 단순한 난방 연료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기꺼이 뜨거워지는 삶’의 은유가 된다.
안도현의 또 다른 작품 〈연탄 한 장〉은 이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또다른 말도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안도현, <연탄 한 장> 전문
시는 세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에게 연탄 한 장이 될 수 있을까.”
요즘 같은 시대, 바스락거리는 종이가 아니라 딱딱한 액정을 만지는 나날이지만, 여전히 시는 가장 ‘가성비 좋은 위로’라고 할 수 있다. 치킨 한 마리에 삼만 원을 주고도 허무함을 느끼는 시대에, 시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온기를 건넨다. 유리잔 소리에 예민해지는 날에도, 아이의 울음에 지친 밤에도, 시 한 편은 작은 연탄처럼 마음을 덥힌다.
그래서 나는 또 시를 읽는다. 곧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작은 연탄처럼, 시는 언제나 삶의 불씨가 된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나는 누구에게 연탄 한 장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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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명 - 서나연
*코너 제목 - 하루 한시 ㅣ 에세이 쓰다, 시를 배우다
*코너 소개 - 에세이를 쓰다 시를 배우게 된, 엄마이자 작가의 기록. 시 한 편을 중심으로, 일상의 감정과 나름의 결론을 햄버거처럼 차곡차곡 쌓아 전합니다. 가끔은 뜨겁고, 가끔은 물컹한 한입을 함께 나눠요.
*작가 소개 - 문예창작과를 나와 유독 ‘시’감성이 충만한 글러버입니다. 매일 쓰고, 다듬으며 살아갑니다. 공저 에세이집 <전지적 언니 시점> 등을 펴냈고, 지금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무엇이 될까요?” 그 질문이 저를 살게 합니다. 언젠가, 저는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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