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지금, 우리가 자라는 시간
육아와 자아 사이_노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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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온 세상이 멈춰버린 듯한 새벽. 차가운 공기를 뚫는 울음소리와 함께 우리 둘만의 시간이 열린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재빠르게 무거운 몸을 일으켜 너를 안아 올리고, 다급히 앞섶을 풀어 헤쳐 온기를 나눈다. 우리만의 공간은 다시 적막해지고, 조마조마하던 내 마음도 살짝 가라앉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이 순간의 고요는 언제라도 깨질 수 있음을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다. 숨죽인 잠시간이 흐르고 스르르 느슨해질 즈음, 신기하게도 나는 너와 완전한 하나가 되었는데 온전히 혼자 남겨진 시간을 마주한다. 함께인데 쓸쓸하다. 고요한데 마음은 소란하다.
생존을 위한 몸짓으로 치열한 너를 품에 안은 채,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SNS를 연다. 외로운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인데, 사실 언젠가부터 무의식의 영역에 들어온 습관 같은 것이 되었다. 함께 일했던 동료가 대학원에 합격했단다. 일도 하면서 애도 셋이나 키우면서, 대단하다 참. 나는 애 하나 보기도 버겁구만. 자기 업계에서 꽤 잘나가는 친구는 또 한 번 이직한단다. 하, 멋지네. 이번에는 연봉이 또 얼마나 올랐으려나. 글쓰기 모임에서 알게 된 이는 최근 출판한 첫 책으로 북토크를 한다며 광고한다. 너무 부럽다. 아니, 뭐 책 표지마저 이렇게 이쁘고 난리래. 얘는 호주에서 살다가 갑자기 이탈리아로 이사를 간 모양이다. 캬, 이탈리아 좋지. 어느 동네인지 구글 지도에서 검색해 본다. 언제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장해둔다. 다들 참 좋겠다. 모두 움직이고 있다. 뭔가 하고 있고,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이 어두운 방 안에 너와 둘이 갇혀있는 나는 매일 거의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하며 제자리에서 쳇바퀴 돌고 있다. 지금 나의 가장 큰 걱정이라고는 당장 두 시간 뒤에 또 눈을 떠서 너를 먹여야 한다는 사실 정도고, 이런 삶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이 버겁다. 열 달 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해외로 출장 다니며 활개 치던 내가 너무 멋지고 그리워서 서럽다. 젖 먹던 모습 그대로 잠든 너의 작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는데 자꾸 눈물이 난다. 나를 비워 네가 채워지고 있는 것 같다. 작은 소리에도 흠칫 놀라는 너를 행여나 깨울까, 숨죽여 흐느끼자니 더 주체할 수 없다. 서러워서 우는 건지 미안해서 우는 건지 모르겠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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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온 세상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새벽. 무거운 몸을 일으켜 너를 향해 걸어간다. 조심스레 네 방문을 열고 빼꼼 들여다보면, 똘망똘망하게 두리번거리던 너와 눈이 마주친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활짝 웃는다. 나를 향해 있는 힘껏 기어 오는 너를 품에 안아 온기를 나눈다. 포근하게 환해진다. 우리 둘 다 이제 할 만큼 해봤다는 듯 노련해진 몸짓으로 나는 티셔츠를 올려 젖히고 너는 달려든다. 더워진 날씨에 네 뒷머리는 땀에 젖고, 이따금 입을 떼고 손가락으로 장난도 친다. 참 많이 자랐다. 홀쭉했던 배가 볼록해지고 나면 온 바닥을 휩쓸며 돌아다닌다. 딸랑이 소리, 옹알이 소리, 쿠당탕탕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울음소리가 뒤섞여 소란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지만 분명 다 듣고 있을 거라고 믿으며 나 혼자서 쉴 새 없이 쏟아내던 말들도 오후가 되면 피로를 못 이기고 잦아든다. 아이 혼자 노는 시간이 창의력을 키워준다던 말을 되새기면서 죄책감을 떨치고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집어 든다. 대학원에 합격한 지인은 벌써 첫 학기를 마쳤대고, 이직 전에 유럽 여행을 하던 친구는 화환 가득한 새 출근을 했다. 출판한 지인은 독립서점에서 또 다른 북토크를 한단다.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다니는 것 같던 친구는 어느새 또 일본 여행을 하고 있다. 후, 다들 좋겠다. 모두 여전히 뭔가 하고 있다. 멋지다. 부럽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여러 번 반복하니 하루가 또 갔다. 나도 뭔가를 한다. 육아를 한다. 여전히 거의 온종일 우리 둘뿐이고, 뜨거운 바깥 날씨는 우리를 집안에다 가둬놓았고, 점점 무거워지는 너는 이제 체력적으로도 버겁다. 하지만 너는 자랐다. 나를 보고 미소 지을 줄 알게 되었고, 나를 향해 기어 올 수 있게 되었고, 젖이 아닌 음식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이 집안에 너와 머물러있으면서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지난날을 그리워한다. 그럴 때면 여전히 서러워진다. 그래도 이제 조금씩 이것저것 손을 대볼 엄두를 낸다. 예전에 하던 것들, 새로 해보고 싶은 것들을 기웃거리며 외도할 틈을 노린다. 그와 동시에 너와 함께 여행할 곳도 꿈꿔보고, 너에게 불러주고 싶은 노래도 배워본다. 골몰하며 너의 식사 일정표를 만들다가도, 아주 오랜만에 업무 일정이 저장된 다음 달 달력을 보며 설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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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리를 되찾아가고 있다. 아니,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그 시간은 어느덧 저 멀리 흘러갔다. 멈춘 것만 같았던 그때, 돌아보니 나는 너의 세계를 만들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너와 나의 세계가 만나 더 넓은 세상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향해 조용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그때, 대신 지금 매 순간순간을 더 꼭 움켜쥐고 싶다. 넓어진 우리의 세상에서 뭐든 즐겁게 잘해보고 싶어 몸도 마음도 분주해진다. 내 곁의 너, 어느새 이만큼 자란 너와 함께라면 왠지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서로를 채워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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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아와 자아 사이 일 중심의 삶에 임신-출산-육아의 세계가 찾아오면서, 그 사이 어디쯤에서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가는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 글쓴이 - 노현정 (noh.hyounjung@gmail.com) 교육 x 국제개발협력 언저리에서 일하고 여행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다정한 우리를 꿈꾸며 글을 씁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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